ep14. 마음을 전하는 데 언어는 중요치 않아

부르고스 - 카스트로헤리츠

by 정한결

조삼모사식 방법으로 선택한 부르고스 연박 연장.

하루 더 즐기고 40km 대장정의 아침이 밝았다.

갈길이 먼 관계로 아침 6시 반에 여정을 시작했다.


대도시는 외곽 지역이 넓어서 밖으로 나가는 데 한참이 걸린다.

찬 공기를 뚫고 한참을 걷자 익숙한 까미노의 자연이 나왔다.


원래 12km 지점에서 쉬고 가기로 했는데 다들 컨디션이 좋아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게 텐션이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을 때 최대한 많이 걸어둬야 한다.


시작점인 생장피에드포르부터 부르고스는 육체적 부담이 큰 '몸의 길', 부르고스부터 라바날까지는 정신적인 어려움이 닥치는 '마음의 길', 라바날부터 끝까지는 고통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는 '영혼의 길'이라고 불린다.


부르고스부터 시작된 이 날 여정이 마음의 길의 시작이었다.

십자가도 그전까지 보던 것과 다른 형태였다.


미군들이 파병이 끝나면 그 지역 전선에 신발을 던지고, 신발이 거기 걸리면 이곳에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미신을 믿는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신발도 그런 의미로 던져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km 지점에 있던 마을 Hornillos del Camino(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원래였으면 묵고 가는 거점이 됐을 마을이다.

오전 내내 컨디션이 좋아 20km를 4시간 만에 주파했다.

그리고 바를 보자마자 귀신같이 발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달달한 빵을 두 개씩 사 먹으며 에너지 보충을 했다.

빠른 속도로 쉬지 않고 긴 거리를 걸으니 발목이 너덜거리는 기분이었다.

예상대로 한번 쉬고 나니 모두 텐션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극복을 위해 각자 노래를 들으며 각개전투를 하기로 했다.


나는 극한의 효율성이 필요할 때나 집중이 필요할 때 2010년대 초반의 케이팝을 듣는다.

그렇게 중학생 때 듣던 노래들을 들으며 길을 걷다 이 십자가를 만났다.


그리고 십자가에 붙은 수많은 사진과 명패들.

순례길 위 수많은 사진들을 볼 때마다 이것들을 가져온 이들의 가족과 친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했다.


이 광경을 보니 귀에서 나오는 빠른 비트의 노래가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노래를 끄고 한동안 감성에 젖어서 줄줄 울면서 걸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극초반엔 종종 울었는데 이 정도로 눈물이 많이 난 건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동하게 만들어서 마음에 길이라고 불리나 싶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부르고스에서 32km 지점인 Hontanos(혼타노스)에 도착했다.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시점이었다.

이 동네엔 스파로 유명한 알베르게도 있었는데, 당장 그 뜨거운 물에 뛰어들어 너덜너덜한 발목을 지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미 카스트로헤리츠의 알베르게를 예약한 상태였고, 아쉽지만 이곳에서는 쉬어갈 수밖에 없었다.

바에서 순례자들의 단백질 보충원, 또르띠야를 먹고 마지막 8km의 길을 나섰다.


마지막 8km는 다들 힘들다는 말을 입 밖에 낼 힘도 없었다.

한 명이 힘들다고 하면 모두가 처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들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목적지를 조금 남기고는 다시 케이팝을 들었다.

걸을 힘도 없었지만 꾸역꾸역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정말 못 걸을 것 같았다.


그리고 4시 반, 출발한 지 10시간 만에 40km 여정을 마쳤다.

우리가 해냈도다.


카스트로헤리츠에 알베르게까지 예약하고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비빔밥을 팔기로 유명한 알베르게이다.

다들 머릿속에 비빔밥 생각만 가득해서 체크인을 마치고 샤워를 했다.


하체 전체, 특히 종아리에 엄청난 알이 배겨서 마치 해부학을 공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정말 다음날부터 못 걸을 것 같았고, 폼롤러와 알고 있는 스트레칭 방법을 모두 모아 열심히 몸을 풀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다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식당으로 기어내려갔다.

생각 외로 한국인 말고 다른 나라에서 온 순례자도 많은 알베르게였다.

한국인들은 다들 비빔밥을 먹어 한 테이블에 배치됐는데, 여기에 우리 셋과 한국에서 오신 부부 두 분 외에 브라질에서 오신 아저씨가 함께 앉았다.


비빔밥은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

일단 양이 엄청나게 많았다. 고명도 한가득이었다.

같이 나오는 된장국마저 말이 안 되지만 집된장 맛이 났다.

이걸 위해 40km를 걸어온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배가 채워지자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한국인들 사이에 브라질 아저씨가 혼자 앉아계셔서 'Are you going to Santiago?'라고 질문을 했는데 영어를 아예 못 하시는 분이었다.

포르투갈어 사용자들은 스페인어도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에 듀오링고로 얻은 스페인어를 박박 긁어 질문을 던졌다. 'Va a Santiago?' 했더니 반가워하며 그렇다고 하셨다.


그분은 걷는 순례자가 아니었다.

Bicicleta(자전거)를 타고 오셨다기에 첫날 생장에서 Bicicleta를 타고 Montaña(산)를 넘으셨냐고 물었다.

그런 식으로 대화가 신기하게 통했고 내가 또 대충 이해한 걸 테이블의 한국인들에게 번역해 주며 어쨌든 다 같이 즐겁게 대화를 했다.

그렇게 바디랭귀지 80 + 스페인어 15 + 영어 5로 구성된 대화를 했다.


대화를 하고 서로의 나이를 묻던 중, 그분이 번역기를 켜 나흘 후가 본인의 50번째 생일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까미노도 5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순례길 위 낭만 한도 초과!


그 말을 듣고 테이블에 있던 부부 중 남자분이 자기도 50살이라고 하셨다.

두 분은 갑자기 국적을 뛰어넘어 75년생 친구가 되었다.


다 같이 와인까지 한가득 마시며 흥이 올랐다.

그렇게 테이블의 모두가 함께 사진도 찍고, 그분이 가지고 다니시는 티셔츠에 방명록 같은 글도 썼다.


즐겁게 대화를 하던 중 브라질 아저씨가 번역기에 이런 말을 써서 보여주셨다.


Yesterday no one talked to me! Today a nice dinner and a good chat! | liked you guys!

어젠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걸었는데 오늘은 맛있는 저녁식사와 재밌는 대화를 나눴어. 나 너네들이 좋아!


마음이 찡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함께 시간을 나눌 수 있어 감동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엔 그보다 더 진한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


와인을 많이 마셔 알딸딸한 상태로 방에 올라왔다.

몸은 힘들지만 기분 좋게 배가 불렀고, 마음까지 즐거움과 행복으로 가득했다.

역시 까미노의 매력은 사람에게 있구나 또다시 느낀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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