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2. 게으른 자만이 누리는 평화

부르고스

by 정한결

원래 계획은 부르고스에서 약 40km 떨어진 Castrojeritz(카스트로헤리츠)까지 이틀에 걸쳐 가는 거였다.

그런데 이틀간 부르고스에서 놀고먹고 출발을 하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러다 '그냥 하루 더 놀고 40km를 하루에 가자!' 하는 미친 아이디어가 나왔다.

놀랍게도 JH, SY, 나 모두 이 계획에 동의했다.

미친 계획은 혼자 시행하기 어렵지만 여럿이 함께라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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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단은) 마음이 편한 부르고스에서의 셋째 날이 밝았다.

원래 같으면 이른 아침 길을 떠났어야 했지만 우리에겐 하루가 더 있었다.

예정에 없던 여유로운 아침, 전날 호화롭게 먹고 남은 음식이 든든한 아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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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비앤비 2박이 끝났기 때문에 새 숙소로 가야 했다.

1박에 10유로 밖에 안 해서 인기가 많은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에 오픈 시간을 맞추어 갔다.


여기 침대는 일직선의 철제 계단이었는데 까미노 전체에 걸쳐서 가장 아픈 계단이었다.

맨발로 올라가는 게 고문같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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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체크인을 마친 후엔 전망대에 가서 부르고스 풍경도 내려다봤다.

이 도시에서 3일째 시간을 보냈지만 이 풍경을 마지막 날에나 간신히 봤다.


숙소에서 밀린 일기도 쓰고, 이후 일정을 위해 라면도 샀다.

시간은 많지만 알베르게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의 피로를 여기서 풀겠다는 마음인 건지 부르고스에 있는 내내 낮잠을 미친 듯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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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겸 저녁으론 전날 남아서 챙겨 온 파스타도 알뜰하게 챙겨 먹었다.

음식 낭비하는 걸 싫어해서 그냥 버리라는 야유에도 이걸 굳이 굳이 챙겨 왔는데 다 같이 맛있게 먹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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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열리는 미사에 참석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내부는 내가 지금까지 가본 모든 성당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아쉽게도 예배당은 사진 금지라 눈에만 꽉꽉 담았다.


부활주일에 순례자 전용 미사를 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러려고 늑장을 부려 부르고스에 길게 남아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사는 거의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음이 따듯함으로 가득 찼다.

Pilgrim(순례자)과 Protectar(보호하다)는 알아 들었다.

축복을 가득해주신 게 분명했다.

여기에 부활주일 성찬식까지 하고 나왔다.


미사를 드린 셋이 같은 마음이었는지 다들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성당 복도에서 SY님이 별안간 그룹허그를 하자고 제안했다. 귀여운 사람.

그룹허그를 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각자 짧게 기도를 드렸다.


큰 강당 같은 공간에 침대 벽으로만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알베르게라 한 곳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코를 심하게 고는 아저씨들은 공용 공간에서 정면으로 자면 안 되는 법을 만들어라'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코골이로 가득 찬 괴로운 밤을 보냈다.

그런 공용 공간에서 자기만 편하게 자고 남들은 깨운다는 점이 괘씸할 정도의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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