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 대도시의 유일한 목적

아헤스 - 부르고스

by 정한결

24km 떨어진 다음의 목적지 Burgos(부르고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세 번째 대도시이고, 이곳엔 무려 한식당이 있다!

오랫동안 한식에 굶주렸던 우리들은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한식당 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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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과 주황, 보라색의 오묘한 아침 노을이 예뻤다.

길지 않은 여정이라 느긋하게 준비하며 일출을 맘껏 즐겼다.


시작부터 상쾌한 아침 공기에 속도가 잘 나 엄청난 속도로 30분 정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앞사람 가방에서 달랑거리는 모자를 봤다.

싸했다.

숙소에 모자를 놓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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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귀찮아서 '어차피 큰 도시 가는데 싸구려 모자 그냥 버릴까' 했다가 전날까지 긴축정책이니 뭐니 했던 게 생각났다.

결국 30분의 길을 되돌아갔다. 아침부터 1시간의 멍청도로를 걸었다.

되돌아가는 길은 힘들지 않았지만 길을 떠나는 모든 이들과 역방향으로 걸으니 민망했다.

어떤 할아버지는 길 건너에서 큰 소리로 "Did you lose something?"이라고 물었다.

Yes, I d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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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헤스에서 나오는 길은 자갈이 가득한 오르막이었다.

옛날 순례자들이 '순례'를 위해 걸었을법한 성경적인 비주얼이었다.


오르막의 끝엔 십자가가 있었다.

모자를 잊고 나온 덕에 주위에 아무도 없이 고요하게 십자가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지나온 여정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안전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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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계속 바람이 불고 날이 추웠다.

이 날도 뻥 뚫린 길에 강한 바람이 계속 불었다.

조금 늦어져서 그런 건지 내내 도로에 사람이 평소보다 적었다.

오랜만에 온전히 혼자 걷는 길이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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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한식당에서 먹기로 했기 때문에 간식을 사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바가 보이자마자 스무스하게 입장했고 또 스무스하게 나폴리타나를 시키고 말았다.

순례길 위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다.

바가 보이면 저항 없이 나폴리타나를 먹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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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의 길은 최악으로 재미가 없었다.

부르고스로 입성하려면 몇 시간을 차도에서 걸어야 한다.

이 길은 위험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악명이 높다.


자연의 아름다움도, 사람들과 나누는 재미도, 길의 감동도 없는 길이었다.

도파민 넘치는 대도시 부르고스에 가려면 이런 지루함을 견뎌내야 하는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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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는 도시 외곽 지역도 넓어서 윤곽이 보인 이후에도 한참을 걸어야 한다.

한식당까지 10분도 남기지 않고 JH & SY을 만났고 다들 이 지루한 길에 있는 대로 지쳐서 발과 폴대를 질질 끌며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부르고스, 정확히 말하자면 부르고스의 한식당 도착!

'소풍'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지치고 배고픈 우리는 서둘러 들어가 함께 나눠 먹을 음식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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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고심 끝에 고른 메뉴들인데 나오고 보니 모두 빨간색이었다.

한국의 위암 발생률이 높은 이유를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음식은 기대만큼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한식당 치고 맛있는 게 아니라 그냥 음식이 맛있었다.

아일랜드에 1년 살면서 더블린에 있는 모든 한식당을 섭렵했는데, 어째서 수도인 더블린의 한식당보다 스페인의 도시 중 하나인 부르고스의 유일한 한식당이 더 맛있는 가에 대해 나 홀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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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르고스 도심을 거쳐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에 체크인까지 완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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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고 씻고 난 후엔 곧바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보상 심리가 발동해 대도시에만 오면 먹기 바빴다.

소시지와 꼬치를 굽고, 짜파게티를 끓여서 점심을 먹지 않았던 냥 바쁘게 해치웠다.

음료에 넣을 얼음까지 사는 호사를 부렸다.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럭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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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식으로는 멜트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로그로뇨 편 글에 등장한 그 케이크. 그때도 말했듯 순례길 여정엔 오직 로그로뇨와 부르고스에서만 맛볼 수 있다.

모든 맛을 다 섭렵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산 로투스와 오레오 맛. 둘 다 엄청난 비주얼보다도 더 맛있어서 다들 정신없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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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도 먹고 또 먹었다.

아침부터 함께 Dia(디아)로 가 슈퍼빵을 3개씩 샀고, 오는 길에 두 개씩 먹어치웠다.

점심으로 매콤한 파스타를 한가득 해 먹었다.

배가 고프지 않는데도 계속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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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요리를 잘하는 JH님과 HY님이 요리 배틀을 했다.

자기가 더 맛있게 만든다며 알아서 요리를 해 주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니,,,

그들이 만든 알리오 올리오와 내가 만든 에그인헬, 고기까지 호화로운 저녁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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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먹고 질리지도 않는지 아이스크림에, 새로 사 온 다른 맛의 멜트케이크까지 먹었다.

대도시에만 가면 앞으로 며칠을 굶을 사람들처럼 이렇게 먹고 또 먹었다.

이것이 대도시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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