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벨로라도
보통의 알베르게는 8시까지 체크아웃을 해야 해서 반강제로 일정을 빠르게 시작하곤 한다.
하지만 산토 도밍고에서 머문 곳은 일반 숙소였기 때문에 체크아웃이 11시였고, 늦은 체크아웃을 즐기며 여유롭게 길을 나섰다.
전날 원래 신던 낡은 등산화를 버리고 새로 산 신발을 첫 개시한 날이었다.
하도 많이 걸어서 당연스럽게 발이 아픈 줄 알았는데, 신발을 바꾸니 통증이 훨씬 덜했다.
돈을 써야 할 때는 쓰라는 교훈을 얻었다.
보통 이른 아침에 출발해도 9시쯤이면 더워져 바람막이를 벗기 마련인데, 이 날은 칼바람이 계속 불어서 10시가 넘어서 출발했는데도 내내 바람막이를 벗지 못했다.
하늘은 청명했는데 날은 기억에 남게 추웠다.
걷던 길에 개 두 마리와 염소를 데리고 다니는 순례자를 만났다.
개는 가방도 지고 있었다.
까미노에서 자기만의 짐을 지는 건 인간뿐이 아니다.
산토 도밍고에서 약 7km 떨어져 있던 첫 마을 Grañon(그라뇽).
꽤나 큰 거점이어서 귀여운 마을도 구경하고, 과자를 팔던 베이커리도 들렸다.
과자 무게로 돈을 받는, 나에겐 낯선 스페인 시골 방식이었다.
그라뇽을 지나치면서 나오는 풍경.
까미노를 걷기 전, 상상해 오던 까미노의 모습 그 자체였다.
평화로워 보이는 사진과 달리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지형을 걸으며 온 사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을 맞고 다들 실성해 버렸다.
우리는 여기를 '바람의 언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라뇽 이후로 나온 마을들은 모두 규모가 매우 작았다.
춥고 지쳤는데 쉴만한 곳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전날 미친 결정으로 산토 도밍고까지 이동하지 않았다면 이 중 한 곳이 오늘의 거점이 됐을 텐데, 여러모로 산토 도밍고까지 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다 언 채로 콧물을 줄줄 흘리며 도착한 식당.
도로 옆에 큰 식당이 있는 게 능이백숙이라도 팔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우리끼리 '능이백숙 50유로면 사 먹는다 안 사 먹는다?' 따위의 영양가 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들어섰다.
아쉽게도 능이백숙은 안 팔지만 따듯한 카페 콘 레체는 있었다.
츄러스를 팔길래 사 먹어봤는데 실망스러운 맛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커피는 그동안의 고생을 녹이기에 충분한 맛이었다.
밖엔 또 어떤 칼바람이 펼쳐질지 훤했기에 나가기 싫어 한참을 질척이다 갔다.
그렇게 오래 있었는지 몰랐는데 한 시간이나 쉬다가 나왔다.
바람은 마지막까지 그치지 않았다.
벨로라도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부터는 걷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날씨가 너무 따듯해서 바람막이가 굳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이날에서야 바람막이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이게 없었다면 진작에 동사했을 것이다.
칼바람을 뚫고 5시가 넘어 도착한 벨로라도.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었는데 바람의 힘 때문에 한참이 걸렸다.
도착한 알베르게는 수영장이 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도저히 수영할 날씨가 아니었다.
그저 따듯한 샤워만이 간절했다.
(물론 유럽 사람들은 그 날씨에도 수영을 하고 있었다.)
공용 공간 벽면엔 그동안 알베르게를 거쳐간 순례자들의 사진과 글이 있었다.
사진만 봐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순례자와, 언제 다녀갔는지 모를 한국인의 글.
이 글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이 길의 끝에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있길.
공용 주방엔 전자레인지밖에 없어서 슈퍼에 가서 전자레인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즉석식품을 샀다.
스페인 슈퍼에선 전자레인지 빠에야 제품을 판다.
나는 이렇게 슈퍼에서 그 나라의 특색이 보이는 게 귀엽다고 생각한다.
플라스틱 용기 두 개로 구성된, 포장지에 덮밥이 그려진 제품이 있었다.
용기 하나는 밥이고 하나는 밥에 올려먹는 음식인가 하고 샀는데 알고 보니 둘 다 즉석밥이었다.
'조리예'를 보고 속은 것이다.
스페인어를 모르면 맨밥만 두 개가 되는 이런 일이 생긴다.
독일인과 오스트리아인이 가득했던 알베르게여서, 공용공간에서 일기를 쓰는 내내 독일어가 들렸다.
슈퍼에서 산 음식(즉석밥 2개)으론 부족했던 JH & SY님은 나가서 식사를 하고 왔고, 나에게 남은 피자를 싸다 주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싸 온 음식까지 맛있게 먹고 배부르게 누웠다.
추운 바깥 날씨에 알베르게도 너무나 추웠다.
오랜만에 빨리 아침이 오길 바라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