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디아(Dia)가 있다면 갈 수 있어

벤토사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by 정한결

원래 계획했던 목적지는 벤토사에서 25km 떨어져 있던 Cirueña(씨루에냐).

메인 까미노 루트에서 벗어나 있던 곳에서 출발해서 그런지 시작부터 고요한 길이었다.


JH & SY님과 계속해서 같은 길을 걸었다.

놀라울 정도로 우리를 제외한 사람 하나 없는 길이었다.

첫 거점인 Najera(나헤라)까지 10km여의 길 동안 하늘, 구름, 풀, 꽃, 물까지 자연을 맘껏 즐겼다.


공복인 상태로 10km를 걸으면 상상 이상의 허기가 찾아온다.

음식을 파는 바를 발견하자마자 며칠을 굶은 사람들처럼 들어가 빵을 주문했다.


까미노에서 가장 많이 먹는 음식 중 하나, 나폴리타나.

한국인들은 '빵 오 쇼콜라'라고 많이 부르는 빵인데, 스페인에서는 나폴리타나라고 불린다.

여기에 저렴하지만 속이 꽉 차 있던 샌드위치까지 완벽한 브런치였다.


나헤라는 까미노의 대표 거점답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침부터 꽤나 쌀쌀한 날씨와 칼바람에 내내 바람막이를 입고 있다가 이 도시부터 따듯한 햇살이 비쳐 마침내 바람막이를 벗을 수 있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살이었다는 동화가 생각나는 오전이었다.


나헤라 이후로 계속해서 펼쳐지던 풍경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10일 차가 넘어가니 피로가 쌓여서 텐션이 많이 떨어졌다.

이 속도와 기분으로는 도저히 25km 지점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무나 짧은 거리지만 벤토사에서 15km 거리에 있는 Azofra(아조프라)에서 멈출까 하는 고민도 했다.


그러다 별안간 '숙소에서 고기를 구워 먹자' 하는 의견이 나왔다.

반복적인 까미노 위에서는 가끔씩 이런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지쳐있던 우리에게 미친 아이디어는 도파민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멈출까 생각했던 아조프라에서는 바에 갔다.

커피를 마시며 계획을 재정비했다.

원래 계획은 25km 지점의 씨루에냐였지만, 31km 지점엔 꽤나 규모 있는 도시 Santo Domingo de la Calzada(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가 있었다.

그리고 산토 도밍고에는 모든 순례자들이 제일 사랑하는 대형 슈퍼 체인 '디아'가 있다.

어느 지점 이후에선 디아가 있느냐 없느냐가 머물 거점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정도이다.


15km 지점까지 걷기 싫다고 징징대면서 걸어놓고 15km를 더 걸어갈 미친 계획을 세웠다.

커피를 마시며 산토 도밍고의 숙소를 예약해 버렸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이후의 10km는 도파민의 힘으로 미친 속도로 해냈다.

우리는 나이대가 비슷해서 중고등학생 때 많이 듣던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속도를 냈다.

비가 오다 해가 뜨고, 우박까지 내리는 엉망진창의 날씨였지만 다들 완전히 실성해서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다.


숙소에 가서 저녁으로 뭘 먹을지 토론했다.

고기를 구워 짜파구리와 함께 먹자며 다들 들떴고, 제로콜라도 큰 사이즈로 사자며 환호했다.

큰 사이즈의 제로콜라에 환호한다니, 까미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감사이다.

일상의 가장 평범한 것들이 까미노에선 큰 기쁨과 감사가 된다.


산토 도밍고까지 5km가 남았을 때부터 진짜 위기가 찾아왔다.

도파민의 힘도 떨어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발이 너무 아팠다.


나는 까미노에 갈 때 새 신발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이미 까미노를 2번 걸었던 등산화를 공짜로 얻어서 그걸 신고 시작했는데, 세 번째 까미노에 신발이 파업선언을 했다.

발에 돌멩이가 들어간 느낌이라 몇 번이나 신발을 털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 되니 발에 물집이 얼마나 생겼는지 기대될 지경이었다.


산토 도밍고를 목전에 두고는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이때쯤 되면 발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걷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비도 많이 내렸다.


비와 우박이 동시에 내리던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4시 반이 조금 넘어 도착했다.

마을이 나오자 모든 긴장이 다 풀려 불쌍할 정도로 절뚝거리며 돌아다녔다.


신발은 너무 낡아 밑창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

위로 올라와서 발 앞부분은 신발 맨바닥을 밟았고, 결국 물집이 5개나 생겼다.

얼마나 많은 물집이 생길까 기대했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산토 도밍고가 비교적 큰 도시라서 운 좋게 괜찮은 브랜드의 새 신발도 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까지 온 목적은 디아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반쯤 미쳐서 예약했던 숙소는 알고 보니 주방이 없었다.

여기까지 온 목적이 '고기 구워 먹기'였는데 그게 불가능한 곳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전자레인지가 있었다.

그래서 전자레인지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음식을 먹었다.


디아에서 냉동 볶음밥과 냉동 라자냐, 각종 주전부리를 샀다.

여기에 로그로뇨에서 샀던 라면까지 이 날 셋이 탄수화물만 8인분 어치를 먹어치웠다.

비록 고기는 없었지만 고기만큼 만족스러웠던 식사였다.


산토 도밍고에 절뚝이며 들어서는데, 먼저 도시에 도착했던 Kim과 마주쳤다.

이틀만의 반가운 재회도 잠시, 그녀는 절뚝이는 나를 보고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침낭도 없이 간 준비성 제로의 순례자였는데, 그녀는 정석처럼 필요한 모든 물품을 갖고 다니는 순례자였다.

본인의 물집 밴드를 주겠다며 호텔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저녁 식사 후 찾아간 호텔에서 물집 전용 밴드와 바늘, 소독용 알코올에 솜까지 받았다.

첫날의 인연이 이렇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자에게 펼쳐지는 이만큼의 온정이라니.

까미노에선 언제나 주변에 귀인이 넘쳤다.


야식으론 끝내주게 맛있는 디아의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SY님과 나는 단 것에 환장하는 입맛이 똑같았다.

이걸 둘이 다 퍼먹으며 내내 환호했다.


이후로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디아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꼭 먹으라고 추천하고 다녔다.

맛있는 걸 먹으니 디아 하나만 보고 달려온 30km의 길이 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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