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로뇨 - 벤토사
짧은 이동에 알베르게 예약까지 완료되어 있어 여유롭게 일정을 시작했다.
큰 도시에서 묵고 난 다음 다시 순례길 루트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특색 있고 재미있다.
차로 가면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인데 도시마다 느낌이 휙휙 바뀐다.
난이도가 정말 평이한 길이었다.
자연보다 국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걷다가 십자가가 달려있는 철조망도 발견했다.
오늘의 목적지인 Ventosa(벤토사)에는 슈퍼가 아예 없었다. 근데 알베르게엔 주방이 있어서 밥 해 먹을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는 길에 Navareta(나바레타)라는 마을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다.
JH님이 파스타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고, 이 날이 바로 그 파스타를 맛볼 수 있는 날이었다.
슈퍼에서 파는 파스타와 소스는 정말 저렴하기 때문에 순례자들에게 최고로 인기 많은 식사 중 하나이다.
벤토사를 얼마 안 남기고 벤치에 앉아 쉬던 미국인 아저씨와 잠깐 대화를 했다.
보스턴에서 오셨다기에 보스턴 마라톤 얘기를 하다가, 별안간 영어실력보다 더 중요한 게 스몰토크를 할 수 있는 능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영어를 꽤나 잘하는 상태로 아일랜드에 가서 언어적으로 얻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1년 살면서 스몰토크 능력을 얻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벤토사를 코앞에 두고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시는 스페인 분들을 만났다. 듀오링고로 갈고닦은 스페인어 단어를 있는 대로 박박 끌어다가 대화를 시도했다.
단어 구사밖에 못하는 허접한 실력이어도 말이 통한다는 게 언어의 즐거움이다.
안 하는 것보다얀 낫지 하며 그냥 습관처럼 해왔던 듀오링고가 까미노에서 처음으로 제 역할을 했다.
JS님의 추천을 받아 알게 된 벤토사의 알베르게.
벤토사는 까미노의 대표 거점이 아니다.
메인루트에서 살짝 벗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는, 예술가의 마을로 알려진 곳인데 알베르게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해서 찾게 되었다.
걷는 내내 안 좋았던 날씨가 도착 때부터 마법같이 맑아져 더 행복했다.
좋은 날씨에 유럽인들은 웃통을 까고 정원에서 햇빛을 즐겼다.
그 유럽적인 비주얼마저 알베르게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체크인을 하고 배정된 6인실이 JH님과 SY님과 함께 올라갔다.
근데 가장 먼저 방에 들어선 SY님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러나 싶었는데 방 안에 할머님과 SH가 있었다!
까미노가 모두 끝난 지금까지도 그 길 위에서 있었던 가장 극적인 만남을 꼽으라면 이 날을 뽑겠다.
안 그래도 셋이 할머님과 SH가 보고 싶다고 말하며 걸어왔는데, 오는 길에 만날 수는 없나 살펴보며 걸어왔는데, 연락처도 몰랐던 그들을 같은 숙소의 같은 방에서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이산가족 상봉 현장 같은 드라마틱한 만남 이후, JH님 주도로 함께 파스타를 해 먹었다.
각자 역할을 나누어 마늘을 썰고 볶고 면을 삶고 스크램블에그를 하며 과식을 위한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
페페론치노를 가득 넣어 매콤한 파스타는 한국인 입맛에 딱이었다. 엄청난 양에도 첫 5인분을 빠르게 비우고, 푸실리면으로 2차 파스타까지 먹었다.
중학생 SH는 우리를 만난 후, 정확히는 JH님을 만난 후 눈에 띄게 들떴다.
까미노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형‘의 존재가 좋았나 보다.
그렇게 배불리 먹고 스르륵 잠에 들었다가 날 깨우는 JH & SY 목소리에 일어났다.
노을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을 기억하고 해가 예쁘게 질 때 일몰을 보라며 깨워준 다정한 사람들이다.
노을을 보며 다 같이 셀카도 찍었다.
해가 진 후에도 공용공간에 돌아와 함께 과자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찌 보면 공통점은 한국인이라는 것 하나인데, 별거 아닌 것 같은 그 공통점을 까미노가 특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