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라도 - 아헤스
다음 목적지는 27.5km 떨어진 마을 Agés(아헤스).
시설이 매우 좋은 선착순 알베르게가 있다는 말에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전날 칼바람에서부터 이어진 추위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이 날의 아침 기온은 2도, 4월 중순의 순례길에서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벨로라도에서 벗어나자마자 온 세상이 암흑이었다.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엉망진창 진흙길을 걸었다.
하지만 길만 진흙일 뿐 비가 오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다가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해가 뜨기 직전까지 하늘의 빛깔이 계속해서 바뀐다.
어두울 때는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그러다 저 멀리 주황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아주 이르게 하루를 시작해야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까미노를 걸으며 몇 번 일출을 보았지만 이 아침은 더 특별했다.
별부터 일출까지 그 모든 광경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새벽 공기가 맑고 차가웠다.
숨을 가득 들이쉬니 생리식염수로 코를 헹군 느낌이었다. (해 본 적 없다.)
아침 내내 너무 추웠어서 따듯한 라떼 생각이 간절했다.
몸을 녹이겠다는 생각에 좀 더 걸어볼까?라는 생각은 못하고 그저 눈앞에 보인 첫 번째 바에 서둘러 들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바의 메뉴가 휘황찬란했다.
단 걸 좋아하는 나,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당근케이크.
까미노를 걷다가 당근케이크를 만나는 호사라니, 고민 없이 카페 콘 레체(카페라떼)와 당근케이크를 주문했다.
추운 날 걷다가 따듯한 커피를 마시면 커피를 국처럼 마시게 된다.
분명 커피를 마시는데 국밥 먹을 때 나는 어으~ 소리가 난다.
당근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레몬파운드까지 추가로 주문해버리고 말았다.
매일같이 '긴축정책 해야지' 하다가도 고생 끝에 바에 가면 그 생각을 모두 잊고 만다.
따듯한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까지 먹고 나오니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해가 뜬 이후엔 날씨도 덜 추워져서 청명함만 남았다.
그렇게 JH, SY, 나 셋이 엎치락뒤치락 걷는데 JH님이 갑자기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셋 다 잠깐 쉬면 낫겠지 생각했고 먼저 가라는 그들의 말에 혼자 출발했다.
결론적으로 그날 JH님은 다리 통증이 몇 시간 동안 지속돼서 걸을 수 없었고 둘은 아헤스에 한참 지나 도착했다.
하여튼 혼자 떠나게 된 길.
며칠 동안 도로만 걷다가 오랜만에 오르막 내리막 등산을 했다.
이 길 또한 심각한 진흙탕이었다.
수많은 진흙길을 걸었지만 이 날의 길이 가장 심했다.
걷다 보면 신발에 흙이 엉겨 붙어 발이 무거워질 정도였다.
이틀 전에 새로 산 신발은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걷다가 '진흙탕 길 말고 아스팔트 길 걷고 싶다.'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바람이 웃겼다.
하루에 6-7시간 이상을 걸으면서 바라는 소원이 '그만 걷고 싶다'가 아니라 '아스팔트를 걷고 싶다'라니.
이전에 까미노에서 얻는 교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소박함이었다.
이 소원이 소박함 아니면 뭐란 말인지.
그 교훈을 이미 얻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길에 돌멩이로 까미노 방향을 표시한 거대한 화살표도 있었다.
이런 인간의 귀염성을 사랑한다.
걷다가 간단한 음식과 미술작품을 파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구경하는 나에게 딸기를 하나 주시며 안달루시아의 딸기라고 하셨다.
내가 모르는 눈치니 세비야가 안달루시아의 도시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까미노 오기 전, 3월 포르투갈 여행 때 세비야를 당일치기로 다녀왔었다.
그게 반가워 3월에 세비야 다녀왔다고 말씀을 드리니 갑자기 플라멩코를 쳐 주셨다.
웃으며 Muchas Gracias(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더니 Thank you for your smile.이라고 답하신 스윗한 분이셨다.
전에 로그로뇨 대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렸던 한국인 남자분과 길에서 계속 만났다.
JH님 다리가 나아지지 않아 몇 시간을 길에 있다는 소식을 둘 다 들은 후였다.
그분은 걱정하시며 JH님에게 본인이 예약한 2인용 호텔에서 편하게 쉬라는 제안도 했다.
까미노엔 어떻게 이렇게 베푸는 마음들이 가득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알고 보니 신부님이셨다.
신부님과 까미노를 걸으며 꽤 오랜 시간 대화도 나눴다니 이렇게 큰 행운이!
아헤스 전 마을 San Juan(산 후안)에서 그 분과도 헤어지고 마지막 4km를 홀로 걸었다.
신발을 바꿔서인지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등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8km의 긴 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해냈다.
시설 좋기로 유명한 선착순 알베르게 Albergue FAGUS에 입실도 성공했다.
4인 1실에 방마다 화장실이 있었다.
까미노에서 화장실을 4명이 쓰는 건 5성급 호텔이나 다름없다.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라 배가 고파도 참으려고 했는데 긴 오후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또르띠야를 사 먹고 말았다.
오랜만에 오후 시간이 여유로워서 일기도 가득 쓰고, 낮잠까지 잤다.
그리고 다시 만난 JH & SY.
오는 길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국 아헤스에 도착한 그들.
늦는 바람에 셋이 함께 계획한 알베르게에는 나밖에 못 왔지만 그들도 다른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다리가 아파 쓰러져있는 그를 보고 안면도 없는 스페인 마사지사분이 오랫동안 다리를 풀어주셨다고 했다.
그동안 영상을 찍기 위해 한쪽으로만 폴대를 짚고 다녀 몸의 균형이 무너진 것 같다고 하셨다.
순례길을 걸은 지 2주가 되고 피로가 쌓이다 보니 사람들의 몸 이곳저곳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아헤스는 작은 마을이지만 정말 유명한 햄버거 맛집, La Rustica Caravan Bar가 있다.
오직 햄버거만을 취급하는 곳.
나에게 햄버거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그다지 관심 없는 음식인데 여기 햄버거는 정말 남달랐다.
28km를 걷고 만나서인지 정말 맛집이어선지 둘 다이어선 지는 몰라도 먹을 때는 정말 태어나서 먹어본 햄버거 중에 최고 맛있다고 느꼈다.
하루 종일 긴축정책이 어쩌고를 떠들었으면서 제로콜라까지 야무지게 시켜 먹었다.
다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직원이 치즈케이크를 안 먹으면 후회할 거라며 여자 둘 위주로 영업을 했다.
확실히 영업의 달인이셨다.
홀랑 넘어가 디저트까지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이면 또다시 대도시로 가게 되는 날이었다.
많이 친해진 우리는 이제 함께 연박할 에어비앤비를 예약해 놨다.
에어비앤비에서 뭘 먹을지 기대에 차서 이야기하는데, 큰 콜라 2병을 사서 먹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
대도시에 가서도 이렇게 소박한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순례자들.
우여곡절 많은 날이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