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아스팔트를 걷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

벨로라도 - 아헤스

by 정한결

다음 목적지는 27.5km 떨어진 마을 Agés(아헤스).

시설이 매우 좋은 선착순 알베르게가 있다는 말에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전날 칼바람에서부터 이어진 추위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이 날의 아침 기온은 2도, 4월 중순의 순례길에서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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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라도에서 벗어나자마자 온 세상이 암흑이었다.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엉망진창 진흙길을 걸었다.

하지만 길만 진흙일 뿐 비가 오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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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안 보이다가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해가 뜨기 직전까지 하늘의 빛깔이 계속해서 바뀐다.

어두울 때는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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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저 멀리 주황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아주 이르게 하루를 시작해야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까미노를 걸으며 몇 번 일출을 보았지만 이 아침은 더 특별했다.

별부터 일출까지 그 모든 광경이 아름다워 눈물이 났다.


새벽 공기가 맑고 차가웠다.

숨을 가득 들이쉬니 생리식염수로 코를 헹군 느낌이었다. (해 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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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내내 너무 추웠어서 따듯한 라떼 생각이 간절했다.

몸을 녹이겠다는 생각에 좀 더 걸어볼까?라는 생각은 못하고 그저 눈앞에 보인 첫 번째 바에 서둘러 들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바의 메뉴가 휘황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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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걸 좋아하는 나,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당근케이크.

까미노를 걷다가 당근케이크를 만나는 호사라니, 고민 없이 카페 콘 레체(카페라떼)와 당근케이크를 주문했다.


추운 날 걷다가 따듯한 커피를 마시면 커피를 국처럼 마시게 된다.

분명 커피를 마시는데 국밥 먹을 때 나는 어으~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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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레몬파운드까지 추가로 주문해버리고 말았다.

매일같이 '긴축정책 해야지' 하다가도 고생 끝에 바에 가면 그 생각을 모두 잊고 만다.


따듯한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까지 먹고 나오니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해가 뜬 이후엔 날씨도 덜 추워져서 청명함만 남았다.


그렇게 JH, SY, 나 셋이 엎치락뒤치락 걷는데 JH님이 갑자기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셋 다 잠깐 쉬면 낫겠지 생각했고 먼저 가라는 그들의 말에 혼자 출발했다.

결론적으로 그날 JH님은 다리 통증이 몇 시간 동안 지속돼서 걸을 수 없었고 둘은 아헤스에 한참 지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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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혼자 떠나게 된 길.

며칠 동안 도로만 걷다가 오랜만에 오르막 내리막 등산을 했다.

이 길 또한 심각한 진흙탕이었다.

수많은 진흙길을 걸었지만 이 날의 길이 가장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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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신발에 흙이 엉겨 붙어 발이 무거워질 정도였다.

이틀 전에 새로 산 신발은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걷다가 '진흙탕 길 말고 아스팔트 길 걷고 싶다.'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바람이 웃겼다.

하루에 6-7시간 이상을 걸으면서 바라는 소원이 '그만 걷고 싶다'가 아니라 '아스팔트를 걷고 싶다'라니.


이전에 까미노에서 얻는 교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소박함이었다.

이 소원이 소박함 아니면 뭐란 말인지.

그 교훈을 이미 얻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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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 돌멩이로 까미노 방향을 표시한 거대한 화살표도 있었다.

이런 인간의 귀염성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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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간단한 음식과 미술작품을 파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구경하는 나에게 딸기를 하나 주시며 안달루시아의 딸기라고 하셨다.

내가 모르는 눈치니 세비야가 안달루시아의 도시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까미노 오기 전, 3월 포르투갈 여행 때 세비야를 당일치기로 다녀왔었다.

그게 반가워 3월에 세비야 다녀왔다고 말씀을 드리니 갑자기 플라멩코를 쳐 주셨다.

웃으며 Muchas Gracias(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했더니 Thank you for your smile.이라고 답하신 스윗한 분이셨다.


전에 로그로뇨 대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렸던 한국인 남자분과 길에서 계속 만났다.

JH님 다리가 나아지지 않아 몇 시간을 길에 있다는 소식을 둘 다 들은 후였다.

그분은 걱정하시며 JH님에게 본인이 예약한 2인용 호텔에서 편하게 쉬라는 제안도 했다.

까미노엔 어떻게 이렇게 베푸는 마음들이 가득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알고 보니 신부님이셨다.

신부님과 까미노를 걸으며 꽤 오랜 시간 대화도 나눴다니 이렇게 큰 행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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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헤스 전 마을 San Juan(산 후안)에서 그 분과도 헤어지고 마지막 4km를 홀로 걸었다.

신발을 바꿔서인지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등산이었는데도 불구하고 28km의 긴 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해냈다.


시설 좋기로 유명한 선착순 알베르게 Albergue FAGUS에 입실도 성공했다.

4인 1실에 방마다 화장실이 있었다.

까미노에서 화장실을 4명이 쓰는 건 5성급 호텔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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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라 배가 고파도 참으려고 했는데 긴 오후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또르띠야를 사 먹고 말았다.

오랜만에 오후 시간이 여유로워서 일기도 가득 쓰고, 낮잠까지 잤다.


그리고 다시 만난 JH & SY.

오는 길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국 아헤스에 도착한 그들.

늦는 바람에 셋이 함께 계획한 알베르게에는 나밖에 못 왔지만 그들도 다른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다리가 아파 쓰러져있는 그를 보고 안면도 없는 스페인 마사지사분이 오랫동안 다리를 풀어주셨다고 했다.

그동안 영상을 찍기 위해 한쪽으로만 폴대를 짚고 다녀 몸의 균형이 무너진 것 같다고 하셨다.

순례길을 걸은 지 2주가 되고 피로가 쌓이다 보니 사람들의 몸 이곳저곳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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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헤스는 작은 마을이지만 정말 유명한 햄버거 맛집, La Rustica Caravan Bar가 있다.

오직 햄버거만을 취급하는 곳.

나에게 햄버거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그다지 관심 없는 음식인데 여기 햄버거는 정말 남달랐다.

28km를 걷고 만나서인지 정말 맛집이어선지 둘 다이어선 지는 몰라도 먹을 때는 정말 태어나서 먹어본 햄버거 중에 최고 맛있다고 느꼈다.

하루 종일 긴축정책이 어쩌고를 떠들었으면서 제로콜라까지 야무지게 시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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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직원이 치즈케이크를 안 먹으면 후회할 거라며 여자 둘 위주로 영업을 했다.

확실히 영업의 달인이셨다.

홀랑 넘어가 디저트까지 맛있게 먹었다.


다음날이면 또다시 대도시로 가게 되는 날이었다.

많이 친해진 우리는 이제 함께 연박할 에어비앤비를 예약해 놨다.

에어비앤비에서 뭘 먹을지 기대에 차서 이야기하는데, 큰 콜라 2병을 사서 먹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

대도시에 가서도 이렇게 소박한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순례자들.

우여곡절 많은 날이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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