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매거진 <생존적 소설 읽기>를 다시 수정하여 브런치북 <소설만 깊이봐도 달라지는 삶>으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수정된 글이 브런치북에 발행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방식이 옳고 최선이라는 믿음을 돌아본 적이 결코 없는 것 같은 사람.
가르치려는 대상은 생각도 계획도 없는 그저 교육의 대상으로만 인식합니다.
17살이지만 누구에게도 지배되지 않는 아이가 있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사람을 가만히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왜냐면 그 과정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니까요.
과연 그들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는, 우리는 그런 적이 없을까요?
특히 자녀를 둔 부모라면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저부터요.
애든 어른이든 사람의 마음은 하나가 아니고 누구나 생각과 감정이 있는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복잡한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며 타인도 평면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스토리를 통해 오늘도 마주합니다.
열일곱 살 완벽하게 행복했던 세실은 15년 전부터 홀아비로 지내오며 자유롭게 연애하고, 좀 경박하지만 사업적으로 유능하고 언제나 호기심은 충만한 아버지와 처음으로 프랑스 남부 바닷가 별장에서 한 달의 여름휴가를 함께 할 예정입니다.
아버지 레옹은 별장으로 젊은 정부를 데리고 와요. 그런데 죽은 엄마의 친구인 세련되고 우아한 여자 안이 갑자기 합류하면서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세실과 아버지의 휴가는 순탄치 않음이 예상됩니다. 얼마 후 안과 사랑에 빠진 아버지는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하죠.
아버지의 경박함과 부족한 도덕의식을 잘 아는 세실은 이 결혼을 통해 자유로운 자신과 아버지의 삶이 안에 의해 송두리째 변하리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듯 뻔한 내 인생을 두고만 볼 수 없던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그 계략의 결과로 세실은 그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인생의 슬픔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저 저마다 타고난 본성이 있습니다. 그 본성은 쉽게 바뀌지도 않습니다. 어떤 경험과 환경을 가졌느냐,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를 뿐이죠.
세실은 자신이 행복과 유쾌함, 태평함에 어울리게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누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과 꼭 닮은 아버지와 아주 잘 맞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섬세하고 이해심이 많고 유쾌하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태생적으로 경박하고 정절, 진지함, 약속 같은 개념은 철저히 거부하는 세실의 아버지 레옹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몰랐던 것 같습니다.
우아하고 세련된 안이라는 여자가 자신과 딸에게 이상적인 연인이자 어머니로 보였었는지 자신의 본성은 무시한 채 진정으로 타격을 줄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을까요?
안과 아빠가 결혼할 것이라는 말에 세실의 마음에 우월감과 자부심이 솟구칠 만큼 그녀는 지성의 소유자 안을 늘 우러러봤었습니다. 관계의 거리가 있을 땐 안의 태도가 세실에게 위협이 될 일이 아니었죠. 그러나 새엄마로서 관계가 재정의되자 상황은 급변하죠. 그 지성적이었던 안은 세실을 생각 따위는 없는 그저 진압해야 할 무엇, 처벌해 마땅한 대상으로만 대합니다.
안의 세실에 대한 강압적인 태도는 세실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고 자아가 분열되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했어요. 난생처음 경험하는 일들이었죠.
세실은 박탈당한 자유를 위해 지난 삶을 되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실은 그런 아이였어요. 절대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아이. 그래서 아버지의 질투심을 유발할 계획을 꾸미게 됩니다. 아버지가 반드시 반응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세실의 마음에 줄곧 안에 대한 거부감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안이 자신을 감정이 있고 생각할 줄 아는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 있었어요. 그때 세실은 그녀에게 완패당하고 싶다는 욕망과 애정을 그 어떤 감정보다 강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존재를 인정받았으니까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는 어떤 사람도 견디기 힘든 법이지만, 하나의 사람으로 온전히 대우해 주면 상대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관계라는 것.
이런 안과 세실의 대립을 보며 우리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수없이 돌아봤어요.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존재로 바라봐야 하는지, 나 자신과 그들의 본성이 어떤 부분에서 조화롭고 어떤 부분에서 부딪히는지 깊이 관찰하게 했습니다.
안이 시키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실이 난생처음 방에 갇혔을 때 내면의 잔인성과 처음 조우하게 됩니다. 자유의지가 강한 사람에게 강압적인 태도는 잔인성을 발현시키더군요.
안의 경멸과 무시를 대할 때마다 세실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판단으로 극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완전히 텅 비워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안이 악의가 있어서가 절대 아니라는 걸 세실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좋고 나쁜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음은 상대에게 참으로 가혹하더군요.
안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 옳다는 것을 뒤집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세실은 아직 빚어지지 않은 점토에 지나지 않은 존재지만 틀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아버지와의 둘만의 삶에 있었던 생각할 자유, 잘못 생각할 자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자유,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찾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고쳐주려는 의무감을 갖지 않으면 타인의 결점에 적응할 수 있다"라고 사강은 말합니다.
악의는 없었지만 세실에 대한 안의 의무감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많은 관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안타까웠어요.
그렇게 강인해 보였던 안, 의연한 의지력과 늘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차분함의 안은 레옹의 외도장면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치욕을 느끼죠. 치욕적인 삶을 견딜 수 없는 안은 극단을 선택합니다.
안도 자신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레옹이 자신의 상대로 적합하지 않음을 알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자신에게 진정 타격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안의 마지막 선택을 보며 새삼 깨닫습니다.
세실은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도 안을 한 사람의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저 추상적인 개체로 생각했을 뿐이라는 걸. 그녀의 자신감과 우아함, 지성을 보았을 뿐. 마흔 살,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남자와의 삶을 꿈꾸는 여자의 연약함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죄책감을 느낍니다.
치욕대신 죽음을 선택한 안으로 인해 17살 세실은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이라는 낯선 감정... 슬픔을 알게 됩니다. 세실의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자유로운 본성은 변하지 않고 흐르겠죠. 그러나 안과의 관계에서 알게 된 슬픔으로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방법은 변화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경험에서 스스로 내린 결론을 통해 성장하니까요.
좋고 나쁘고, 착하고 못되고의 이분법적인 판단이 아닌 나와 잘 맞는 관계, 충돌하는 관계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합리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슬픔이여 안녕을 통해 또 배웁니다. 그 관계를 알아차리려면 내가, 우리가 복잡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간을 갖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된 사람만이 좋은 관계를 조우할 수도 있습니다.
사강이 18살에 썼다는 이 소설을 처음 읽고 왜 좋은지를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읽고 세실, 안, 레옹 세 사람을 생각하다 보니 이 소설이 왜 좋은지 알 수 있었고 그 마음을 너무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 책 슬픔이여 안녕을 통해 복잡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마주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쉽지 않지만 우리 시작해 봐요.
나의 마음을,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그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