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의 <모순>
{매거진 <생존적 소설 읽기>를 다시 수정하여 브런치북 <소설만 깊이봐도 달라지는 삶>으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모순의 안진진도 수정된 글이 브런치북에 발행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뜨거운 불구덩이인 줄 알면서 들어간 그곳.
그녀는 그 모순을 극복했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내내 떠나지 않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런 인물들을 하나의 온전한 사람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사람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복잡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고 그 과정의 시간들이 쌓여서 저 자신을 좀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합니다.
모순의 안진진이 그러했습니다.
줄곧 떠나지 않고 머릿속에 똬리 틀고 앉아있는 그녀에 대해 생각한 시간들.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쌍둥이 자매인 엄마와 이모의 너무도 다른 삶은 무언가 요구가 있을 때 스스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던 어린 소녀에게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체념하게 만들었습니다.
중학생 때 새 운동화가 필요하다던 동생을 위해 공장에서 두 달간 돈을 벌어 엄마에게까지 구두를 사주던 당당한 그 소녀는 삶에 대한 탐구를 포기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던 스물다섯 안진진은 어제도 우울했고 그제도 우울했다는 걸 온 마음으로 느끼죠.
열혈을 경멸하고 절대 감정적이고 유치하게 살지 않겠다던 그녀의 삶은 느껴야 할 것들은 모두 적대적으로 걷어차버린 채 분주히 그저 푼돈을 버는 것으로 젊음을 다 보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도 양감 없이 얇디얇다는 것을 말이죠.
빨리 치유되기 위해, 아니 아예 다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서른 살 즈음엔 파산에 이르게 돼서 아무것도 나누어 줄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 아버지의 말이 떠오릅니다.
안진진은 스물다섯에 마음의 파산을 맞이한 것이 아닐까요..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그녀는 양감 있는 삶을 살고자 자신의 인생에 온 생애를 걸기로 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위해 남편을 선택하려고 하죠. 왜 고작 결혼이냐고요? 그 시대가 그런 시대였고, 또 지금도 결혼 여부를 떠나 남녀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삶의 진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랜 관찰 끝에 그녀의 욕망은 김장우를 향하죠. 그러나 그토록 자신의 생을 위해 고민한 그녀는 그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 앞에서 선명해지는 마음과 정서적으로 자신을 꼭 닮아있던 이모의 마지막 선택을 보면서도 끝내 그를 선택하지 못합니다.
미워할 수 없지만 결코 닮을 수 없는 삶을 산 아버지, 타인 앞에서 자신을 번번이 놓쳐버리는 삶을 산 아버지처럼은 결단코 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 극복할 수 없는 타격일 테니까요.
온전한 행복을 찾고 싶은 욕망과 극복할 수 없는 아버지를 닮은 삶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그녀는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지 않았을까요?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와 김장우의 얼굴에서 보이는 아버지를 마주한 그녀는 절대 선명한 마음을 따르는 결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생각하는 힘을 알려준 아버지이지만, 가족도 자신조차도 돌보지 못한 아버지처럼은 절대 살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같이 살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듯한 이모의 마지막 선택.
무덤 같은 평온을 견딜 수 없었던 이모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궁금증도 일으키지 않는 나영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안진진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통해 들여다본 그녀의 차선책에 연민이 느껴져서 마지막 장을 덮고도 그녀를 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향한 욕망을 쫓지 못하고 자신 안의 두려움을 피해야 하는 삶이었기에 그녀가 안쓰러웠습니다.
무덤 같은 평온이 될 수 있는 결혼을 알면서도 한 선택.. 과연 어떠했을지 생각해봅니다.
부유한 이모의 자살이 배부른 투정 같은 분들도 있을 거예요.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할 일 없이 살아가는 것이 과연 어떠했을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존재가치야말로 안진진의 엄마처럼 힘들지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라면 이모의 삶이야말로 물질의 풍요와 관계없이 얼마나 양감 없는 삶이었을지...
스스로 존재를 인정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움이 들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알죠.
물질은 생존의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님을 이모의 죽음이 상기시켜 줍니다.
그런 이모와 정서적으로 꼭 닮아있는 안진진이지만 그녀는 요구가 있을 때 스스로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였어요. 그리고 이모의 죽음과 아버지의 삶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고 스스로 살면서 탐구하고 기꺼이 실수가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여인이기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이 차선책이 남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지 않고 얇디얇은 삶을 스스로 두텁게 채우는 완생으로 가는 선택이지 않을까라는 기대마저 들게 합니다.
심심한 남자지만 나영규의 전염성 강한 웃음과 무궁무진한 활력이 안진진을 웃게 하고 일어나게 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제 모순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습니다.
우리도 안진진처럼 각자의 모순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상적인 미래와 그렇지 못한 초라한 현실의 간극에서 괴로움도 두려움도 느끼죠.
그러나 그렇기에 희망도 있습니다.
비록 그 이상이 멀어 보일지라도 우리가 그곳으로 가고 있는 여정이라면 우리가 꿈꾸는 그 이상은 더는 모순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잘하는 것보다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오늘도 이상과 현실이라는 간극을 줄여나가는 여정 속에 있는 모든 분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잘하고 계시고 오늘도 한 발짝 묵묵히 나아가고 계시니까요.
안진진도 그런 삶을 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