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나는 배고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조의 이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목숨이 걸린 궁지에 몰리면 사람은 무조건 생존 본능에 의존한다. 생존 본능은 빠르고 공정하다. 온유한 유전자보다 훨씬 강력하게 후세대로 물려 내려가는 생존본능은 언제나 필승의 패다 -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있어 필승의 패인 생존 본능.
윤리도 의지도 아닌 태어날 때부터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우리 속에 각인된 것.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요조는 어쩌면 그 생존 본능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존 본능이 없는 요조는 본능 앞에서 충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면 같은 갖가지 얼굴을 보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 부끄럼 많은 생이라고 여긴 요조의 삶이 문장마다 구슬프고 가여웠습니다.
1972년 우루과이의 럭비 팀을 태운 비행기가 안테스 산맥에 추락했을 때 추위와 배고픔 속에 생존자들은 72일 동안 극한의 상황에서 버티며 결국 구조되었습니다.
72일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미 사망한 동료들의 시신을 먹습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과연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다면, 나 자신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살아 돌아온 그들을 동족을 먹은 자들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
2003년 아론 랄스턴은 미국 유타주에서 등반 중에 추락하여 팔이 바위에 끼는 사고를 당해습니다.
그는 127시간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고, 물과 음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습니다. 결국 랄스턴은 자신의 팔을 스스로 절단하고 탈출하는 극단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그렇게 그는 살아 돌아옵니다.
내 이성과 상관없이 몸이 살고자 하는 생존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일들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그래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저자 델리아 오언스는 생존이야말로 필승의 패라고 한 것이겠죠.
이렇게 인간이라면 모두, 아니 대부분 필승의 패를 쥐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요조에게 그런 인간들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요조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 도깨비보다, 용보다 훨씬 더 무서운 동물적 본성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요. 초원의 평화로운 소가 배에 붙은 등에를 순간 꼬리로 쳐서 죽이는 것처럼 불시에 자신의 정체를 ’화‘라는 형태로 폭발시키는 인간의 모습에서 언제나 머리카락이 쭈뼛할 정도의 전율과 공포를 요조는 느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화는 신체와 마음을 빠르게 준비시켜 적 또는 위협에 대응하는 방어적 기제로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감정이라고 합니다. 생존 본능이 없으니 요조는 그런 화도 없는 듯합니다. 사람들과 일반적인 대화도 불가능합니다.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았고, 인간에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그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우스운 행동. 그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극도로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기에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죠. 우스운 행동으로 겉으로는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하면서 속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조. 그 우스운 행동을 수단으로 인간과 가느다란 연결 고리를 이을 수밖에 없었던 삶은 자살 시도와 술, 여자, 약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게 됩니다.
잊을 수 없는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주인공과 친구의 대화죠.
“너 괜찮아?”
“응.. 괜찮아..”
”무슨 일 있어? “
“아니 없어.”
“근데 왜 울어?”
“그냥…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좀 오래 걸렸습니다. 지금도 솔직히 온전히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엔 우울하다거나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프다거나 하는 것들이 대부분은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결 시대인 요즘 우리는 타인의 삶을 접할 기회가 많습니다. 우연히 우울증을 앓았던 분의 글을 읽고 외형이 다르듯 마음의 모양도 다 다른 것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저의 세계에 생긴 작은 틈을 통해 레이디 버드의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있어”라는 대사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고, 그 의문이 인간 실격이라는 책의 문도 열게 한 것이겠죠.
우리의 외형이 다르듯 마음도 모두 다르다는 작은 생각의 틈이 생겼기에 요조의 다름에 공감을, 아니 공감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말처럼, 사람이 힘든 이유도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제가 요조라는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고 그다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그저 사람의 수만큼 마음의 수가 존재한다는 다양성에 조금 더 다가가지 않았을까요. 분명 이 조금의 인지가 다른 문을 또 열어주리라는 기대를 할 뿐입니다.
아무리 요조의 입장을 취해보려 하지만 한두 끼만 굶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요조를 전부 알 수는 없겠지요. 어찌 알 수가 있겠는가 싶지만 그의 절절한 심정을 써 내려간 소설 인간 실격을 통해 출구 없는 나약한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을 해부하듯 써내려 간 인간실격을 통해 여러분도 다양한 사람의 마음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시면 어떨까요? 슬프지만 너무 좋았거든요. 자신을 아는 것이 의지가 아닌 인지의 영역이라면 타인에 대한 앎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 앎은 우리의 마음을 분명 조금 더 확장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세상엔 사람의 수만큼의 다양한 마음이 존재하고, 원래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