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이중성? 사이코패스?
작가가 본 하이드의 폭력성은
작아진 송곳니 속 감춰진 인간의 동물적 본성일까?
아니면 소수의 사이코패스적인 쾌락일까?
인류는 오랫동안 진화를 거듭해 왔다.
그럼에도 우리 뇌는 아직 1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 수렵채집을 하며 살아가던 그때에 멈춰있다.
사바나에서는 먹기 위해 직접 수렵을 해야 했다.
그래서 폭력성은 아직 우리 안에 어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분명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세계사를 보면 수많은 전쟁이 크게 잦아든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중세 영국은 아직 폭력이 만연한 사회였다.
영주와 기사들은 전쟁과 싸움으로 권력을 유지하던 때였으니 당연할 것이다.
18세기부터 경찰 조직이 도입되고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들어서 엄격한 도덕적 규범이 강조되면서 폭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서서히 적응했겠지만 분명 강한 폭력성의 소유자는 더 눈에 띄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고딕소설이 등장한 것이 아닐까?
그동안 소설을 통해 사람을 더 깊이 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 공동체와 사람들을 살기 힘들게 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 원인을 찾아서 읽고 관찰하다 멈춘 곳이 공감능력제로자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도 그런 이유로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인간의 협력을 위한 이성과 내면의 동물적 본능, 이 두 가지 이중성으로 풀기엔 하이드의 살인은 쾌락이었고 사이코패스적이었다.
그렇다고 사이코패스적으로 풀기엔 지킬 박사에게서 수치심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공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중성으로 풀기도, 사이코패스적으로 풀기도 만족스럽진 않았다.
이중성의 상징적 작품으로 충분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인간의 이중성은 생존의 방어적 차원으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착하다'라는 말이 더 이상 칭찬으로만 해석되지 않는 시대인 것이 안타깝다.
어디든 순한 양을 노리는,
인간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공감능력제로인 사람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존적 소설 읽기 연재에 대한 변]
윗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과 사회가 힘들어지는 이유를 생각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던 최근, 저의 관심사가 공감제로인 사람들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요즘의 독서가 소설만이 아닌 인격장애, 공감능력, 뇌과학 등 여러 분야의 잡식성으로 옮겨가다 보니 생존적 소설 읽기의 연재가 매주 정기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생존적 소설 읽기든 매거진을 통해서든 제가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서 느끼고,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을 자유롭게 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든 재미가 있어야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갖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