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적인 실패 후에 비로소 느낀, 자연스러운 달리기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장거리는 달려본 적 없지만, 운동은 좋아하거든요.”
나는 달리기 전문가가 아니다. 달리기 시작한 지 만 2년 6개월 정도라 조언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리고 싶다. 더군다나 나도 나름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도전한 풀코스에서 꽤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말리고 싶다.
하지만 ‘그럼요, 운동을 좋아하시면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라는 대답을 원하는 답정남(혹은 녀)에게 다른 소리가 들어올 리 없다. 어쩔 수 없다. 직접 벽에 부딪쳐 쓰러진 후에야 깨닫게 되겠지. ‘아, 이건 정말 안되는구나’. 예전의 나처럼.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다가 망한 구체적인 사례가 여기 있다. 나의 경험보다 구체적인 사례는 있을 수 없으니 내 이야기를 해본다.
일단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필요한 자료들을 찾았다.
‘첫 마라톤 풀코스 완주, 3개월이면 도전할 수 있다’라던가 ‘마라톤 훈련에 필요한 시간은 14주~30주’라던가 하는 기사들을 본다. 기사를 보면서 마음속 불씨를 부채질한다. 달린 지 6개월이 되었으니 좀 더 하면 할 수 있겠군! 자신감이 솟는다. 기사에는 나이에 따라, 훈련 강도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주의 사항이 있지만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분명히 똑같은 사이즈의 글씨로 쓰여있지만, 느낌적 느낌으로는 보험 계약 시 주의 사항처럼 깨알만큼 작게 보인다. 참 이상한 일이지.
훈련 프로그램을 찾아 열심히 훈련한다. 처음에는 가뿐하지만, 거리가 늘어나고 페이스가 빨라지면서 따라가기 힘들어진다. 몸이 여기저기에서 신호를 보낸다. 발바닥, 무릎, 허리, 어깨에서 고통을 호소하지만 머리는 다르게 해석한다.
‘No Pain, No Gain! 역시 고통이 있어야 얻는 것이 있지.’ 스포츠 브랜드의 멋진 CF처럼 고통을 딛고 한계를 넘는 내 모습을 생각한다. Just Do It!
일이 바빠지면 달리지 못하는 시간도 있기 마련이다. 며칠을 쉰 후 다시 달릴 때는 불안한 마음에 오버 트레이닝하게 된다. 결국 대회 2주 전, 마지막 장거리 훈련을 하다 무릎에 무리가 왔다. 몸이 말했다.
‘제발 쫌! 천천히 하라고!”
그때 내 머리가 한 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회 때 신을 운동화 쇼핑을 했다.
자, 대회의 결과가 어땠을까?
뻔한 말이지만 그야말로 ‘대굴욕’. 10km 지점부터 무릎에 슬슬 반응이 오더니 반환점을 지나서는 도저히 달리지 못할 정도였다. 절뚝거리며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했다. 경기 제한 시간이 다가오자 교통 통제가 이미 풀리고 있었다. 교통경찰들과 해병대 전우회 자원 봉사자의 싸늘한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인도로 올라가세요. 위험합니다.”
“지금 가도 이미 늦었어요.”
나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스포츠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민폐 거리일 뿐이었다.
겉으로는 잔뜩 인상을 쓰고, 속으로는 욕지거리가 이어져 나왔다. 그 욕은 사실 나에게 하는 욕이었다. 진작에 포기하지. 출발하기 전에, 아니면 10km 지점에서 무릎의 통증을 느꼈을 때, 그것도 아니면 2주 전 무릎이 안 좋아졌을 때! 몇 km 남지도 않았는데 포기하기에는 억울했다. 밑도 끝도 없이 ‘복수하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복수의 대상은 지금의 굴욕적인 나.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나의 첫 마라톤의 기억은 참담하다. ‘포기’, ‘실패’란 단어가 주는 암울함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얻은 것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고통뿐인 완주. 별 의미 없다.
그 뒤로 하프 코스 두 번, 풀코스 한번, 산길을 달리는 울트라 트레일 러닝 50km를 두 번 참가했지만, 대회에서 마지막까지 즐거웠던 달리기는 한 번의 하프 코스밖에 없다.
30km 이상 달리면 내 몸은 벽에 부딪친다. 그게 나의 상태였다. 하지만 포기하려는 마음보다 벽을 넘고 싶은 욕구가 컸다.
그래서 자존심을 버렸다. 우선 내 몸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몸의 신호에 귀 기울이면서 호흡과 자세,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달렸고 조금씩 잘못된 것들을 교정해 나갔다. ‘궁극의 완벽함’이 아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간다. 어차피 궁극의 완벽함이 지금 될 리가 없잖은가?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면 길이 아니라 하늘을 달리고 있겠지.
훈련하면서 내 몸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하드웨어가 아니라 사용법이 달라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사용법도 모르면서 썼다가 망가진 제품, A/S를 받고서야 꼼꼼하게 설명서를 보는 느낌이었다.
설명서대로 몸을 사용해 본 첫 대회는 ‘울트라 트레일 러닝 제주’ 100K 대회. 하루에 30km 이상씩 사흘 동안 총 100km를 달리게 되는 대회로, 한라산 코스, 가시리 오름 코스, 성산 해변 코스를 달렸다. 100km란 단어는 사람을 위축 시키기에 충분하다.
'일단 몸을 사리자. 그리고 다음날을 위한 에너지를 남겨 놓자.' 기대감에 흥분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달리는 내내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했다. 몸에 무리가 올 것 같은 묵직한 신호가 오면 속도를 줄이고, 회복되면 다시 서서히 속도를 올리는 식으로 달렸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빽빽하고 흙이 부드러운 숲길에서는 속도를 높였다. 내리막길은 중력을 이용해 빠르게 달리되, 돌이 많은 내리막은 발목을 조심하며 느리게 달렸다.
물론 힘들었지만 몸에 큰 무리 없이 기분 좋게 달렸다. 달리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꼈다.
더군다나 상항이 최악이었던 마지막 날에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 해안 도로 코스이기 때문에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가 대부분이었고, 누적된 피로가 몸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몸을 사리며 느리게 달렸지만, 달린 지 한 시간쯤 지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일 수 있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마구 쏟아지는 10월의 비가 열을 식혀 주었고, 먹구름 가득한 바다의 풍경은 팀 버튼의 영화,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속 풍경 같았다. 이 암울한 풍경 속에서 엔돌핀이 분출했다. 좋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비가 거세지면 물 고인 도로를 첨벙 거리며 신나게 달렸고, 비가 잦아들면 느리게 달리며 에너지를 아꼈다. 페이스는 들쭉날쭉했지만 즐거웠다. 우울한 날씨가 오히려 내 감성을 터트렸고, 이제껏 분위기 파악 제대로 못했던 뇌는 엔돌핀을 분출시키며 모처럼 좋은 일을 했다. 덕분에 결승선 지점 6km 전부터는 남아있는 에너지를 모아 빨리 달릴 수도 있었다. 대회 기록은 전체 참가자의 중간을 넘겼다. 기록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적어도 중간은 가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목표에 대한 집착은 과정을 의미 없게 만든다. 결승선에 대한 집착, 기록에 대한 집착은 몸을 긴장시키고 자연스러운 자세를 방해한다. 먼 거리를 가려면 멀리 있는 결승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 상태를 끊임없이 체크해야 한다. 바른 자체로 달리는지, 힘이 들어간 부분은 없는지,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지 인지하면서 달려야 한다. 물을 마시고, 에너지를 보충하는 주기도 신경 쓰지 않으면 힘들어진다. 내가 얼마나 달려야 몸이 풀리고 어떤 코스가 유리하고 불리한지 알고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내 몸의 능력을 뛰어넘는 결과를 바라지 말자. 순간을 즐길 줄 알고 그것이 결승선까지 이어졌다면 더 바랄게 뭐가 있는가?
작가의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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