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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길: 디지털 세대가 양산한 쓰레기들

'죽음'의 소비자들

by root
우리는 이제 타인의 죽음 마저 ‘실시간 콘텐츠’로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몇년 전 영국 가디언 紙는 “최초의 소셜 미디어 자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 청소년이 기찻길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을 실시간 동영상 플랫폼에 생중계한 충격적인 사건을 다뤘다.

영상은 곧 바로 SNS를 통해 급속히 퍼졌고, 실시간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화면을 캡쳐하거나 댓글을 남기고, 쉴새없이 ‘좋아요’를 눌렀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그 죽음이 한 사람의 절규가 아니라 집단적 냉소 혹은 흥미거리의 기록물로 변질되면서 소비된 것이다.

이러한 풍경은 낯설지 않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는 높은 다리위 교각이나 건물 옥상위 난간에 매달린 한 인간의 절망에 찬 외침이 하나의 이벤트성 자극으로 유통되고 있다. SNS는 어느새 자살 시도의 현장을 생중계하는 도구가 되었고 댓글란은 그에 대한 위로 보다는 포르노와 같은 단순 흥미거리로서의 관전평으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진정으로 되물어야만 한다. 우리는 더욱 더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더욱 더 깊이 무디어졌다. 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마음 아파하거나 슬퍼하기 보다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를 어떻게 더 자극적으로, 더 흥미롭게 보여줄지를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 이 사람의 삶에 어떤일이 생겼는가’ 보다 ‘내가 얼마나 더 빨리, 더 많이, 독점적으로 보여주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한 인간의 죽음을 마주한 절망 마저도 내 SNS계정의 콘텐츠로 삼게되는 이 기이하고 흐트러진 구조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인간 자체'보다는 '그 장면의 자극성'에 반응하게 되었다. 분명 삶의 편익을 증진하게 된 스마트폰이 사람들간의 중요한 연결 도구였으나 이제는 오히려 ‘단절의 컨텐츠를 제작하는 도구’가 되었다.

한 사람의 절망스러운 삶의 고통이 우리의 손가락 끝에서 생산, 재생, 정지, 삭제되는 동안에 우리는 점점 그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인간성을 잃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어하게 되었다. 어디에 갔고, 무얼 먹고 마셨는지, 누굴 만났고 어떤 것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것을 말이다. 이러한 우리 삶의 새로운 바탕에서 SNS의 '좋아요' 버튼은 내가 생산한 컨텐츠에 대한 단순한 반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반증이 되었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도 '좋아요' 버튼의 숫자를 높이고 싶어지는 감각은 딱 그만큼의 크기로 우리 자신이 ‘살아 있음’을 외부로부터 확인받는 수단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외부에 의존하게 되는 ‘인증’ 시스템은 ‘인간관계의 종말’임을 의심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의도했건 아니건 고통을 상품화하는 것은 ‘공동체의 파산’으로 연결되었다. 누군가의 고통앞에서 인증을 위한 기록 행위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응답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


결국 우리는 스스로 되묻게 되고, 진정 되물어야만 한다.

만약 내가 그 앞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과연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을까?

그 누구라도 간단하게 대답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이 질문으로부터 ‘회피’를 선택하는 순간 과연 우리는 앞으로도 ‘인간’으로 호칭되어 질 수 있을까?

우리 삶에서 유익한 큰 변화를 가져온 디지털 기술이 그에 잠식된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때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디지털 세대가 양산한 쓰레기들”이라고 불리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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