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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길: 대북전단 갈등과 존재의 책임

‘그들’의 사회를 넘어서

by root

최근 우리 사회의 대북 전단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공방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 갈등이 우리에게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 전체가 작동하고 있는 ‘삶이 펼쳐지는 틀로서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개체화된 한 구성원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접경지역에서의 주민 안전과 남북관계의 안정성을 이유로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반면 이를 주도하는 민간단체는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세계의 정보 전달에 대한 필요성 등의 이유로 대북 풍선을 날리려 하고 있다. 표층에서는 이것이 국가의 질서와 시민의 자유 사이의 충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어느 쪽이 ‘옳음’의 정당성을 가지는가를 둘러싼 단선적 논쟁 이전에, 양쪽 모두의 입장이 ‘일상적 현실의 평면’ 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일상적 현실의 평면이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들(das Man)’로서의 삶이다. 이 삶은 익명적이고 무책임하며,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 스스로를 은닉하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들은 무엇이 옳은가를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한다” 거나 “(누가) 그렇다고 했다”라는 말속에 자신의 존재를 의탁한다. 여기서 개인으로서의 선택과 결단의 ‘책임’은 타인의 몫이 되고, 스스로의 참모습은 ‘그들’ 사이로 사라지게 된다.


대북전단 금지를 둘러싼 정부의 태도는 보도된 바와 같이 ‘질서 유지’라는 명분 아래 모든 추가적인 정치적 고민과 결단을 정지시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위험의 최소화 및 체제의 안정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 그 외의 어떠한 윤리적인 물음 또는 실존적 고민은 그만큼 위축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현실의 평면’ 구조다. 또한 전단을 날리는 민간단체들 역시 “북한 주민의 알 권리”라는 말로 그 행위의 정당성을 내세우지만 진정으로 그 행위에 대한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민간단체 역시 하이데거가 말한 ‘그들’로서의 방식, 즉 필요와 신념이라는 일상적 언어 속에 스스로를 은폐한 채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볼 일이다.


이 문제의 구심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양측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고 행위하고 있으나 그 믿음은 일상의 평면을 돌파해 들어가서 우리 존재의 층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의 언어와 집단의 왜소한 시야 속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로서 우리 모두의 삶에 다가가는 실존적 자세보다는, 입장 싸움이라는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태도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 논쟁은 우리가 얼마나 쉽고 단순하게 자기 스스로의 사유를 포기하고, 집단의 목소리 뒤로 몸을 숨기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의 지평을 뚫고 존재의 본질로 향하려는 우리의 결단과 그 성찰의 방향이다. 수평적으로 펼쳐진 일상과 당연시되는 규범과, 관습의 세계를 돌파해 들어가는 어떤 물음 앞에 우리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기꺼이 마주 서려는 자세다. 우리의 선택과 행위가 그저 편안한 익명성과 반복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고통과 위험을 마음깊이 감각하면서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실존적 결단의 산물인가? 와 같은 바로 이러한 질문 앞에서 도피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를 세우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부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부름은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향해 들려오는 침묵의 소리다. 사회가 어떤 규범을 가지고 있든지, 법의 허용 여부와 상관없이, 누가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지금 이 행위가 공동체를(타인을) 어떻게 만들고, 나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묻는 물음인 것이다. 법과 자유의 이분법적 접근 이전에 ‘나는 왜 이 선택을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스스로 마주 설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수직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이 갈등의 찬반 의견 속에서 진짜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반대의견을 가진 상대편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무사유, 책임의 회피, 일상성에 숨는 ‘그들’로서의 태도다. 이 갈등은 단지 대북전단을 날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어떤 존재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할 것인가를 묻는 갈등이 되어야 한다.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공동존재하는 타자의 고통을 감각하고,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을 지게 되며, 공동체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이 갈등을 둘러싼 분열은 어느 한쪽의 승리라는 형태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진정한 해결은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를 진지한 시선으로 스스로에게 물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다. 더 깊이 들음으로써 진실한 침묵으로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고 풍선을 더 멀리, 더 많이 날리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책임지는 결단적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공동체적 실존이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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