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앞의 존재, 준비하는 진정한 나로 사는 길
우리는 지금 어떤 방주를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이탈해 다른 어떤 선택들을 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아야겠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종교적 구원의 서사를 넘어서 우리가 위기 앞에서 취할 수 있는 ‘끝’을 어떤 감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 배경이 되는 당시의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했다고 선언되었습니다. 이는 도덕적 탈선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더 이상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하고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감응이 마비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우리는 지금 현재의 세계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습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홍수’는 어떤 교훈을 제공하는 것일까요? 생태환경의 위기나 기술의 폭주, 공동체로서의 기능마비와 해체 그리고 타자성의 소멸이 홍수의 원인 됨일까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위기로는 이 모든 것을 ‘위기로 읽어 내지 못하는 감각의 상실 또는 부재’ 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들 앞에서 아직 멀었다거나 오늘은 아니라는 말로 위안을 삼습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당대의 사람들은 하늘이 맑은 날 배를 건조하고 있는 노아를 지금 현재의 우리 모습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라는 현상을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정동이라 말합니다. 노아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가 진동할 때 찾아드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감하고 그 예감으로부터의 통찰을 통해서 ‘결단을 실천’하는 자가 된 것이죠. 그리고 노아가 제작한 방주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예비하는, 진정한 나다움의 세계를 예비하는 윤리적 공간이었습니다. 그는 혼자만을 위해서 배를 만들지 않았고 다른 생명체를 위한 자리도 준비했던 것입니다. 타자와 공존하는 구조를 구현한 것이죠.
이 이야기의 철학적 핵심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당신은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구축된 노아의 방주처럼 어떤 가능성을 향해서 인간의 참된 나다움의 응답을 준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단지 사유하기 위해서 위기를 대비하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인간 존재를 대하는 우리는 태도를 묻는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방주를 짓고 있을까요? 아니면 방주를 짓는 선택으로부터 이탈해 어떠한 또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방주는 고립으로서의 상징이 아니라 삶을 깊이 성찰한 자만이 길어 올릴 수 있는 응답의 형상입니다. 대홍수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이미 물은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위기이든 우리 개인의 위기이든 정작 우리에게 문제 되는 것은 세상의 파멸이라기보다 이러한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감각일 것입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마비된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바로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