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의 상실과 우리 시대의 떠돌이들
우리는 잃어버렸다. 시간이 머무는 곳으로서, 관계에서 책임을 요구하는 곳, 그 기억의 뿌리가 되는곳으로 가는길을!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으로 그의 고향 이타카로 귀환하기 까지 무려 10여년을 떠돌았습니다. 그의 귀환은 단지 물리적 여정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잃거나, 유혹에 흔들리게 되거나, 파도에 휩쓸리는 일을 겪으면서도 결국 ‘돌아간다’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돌아가고 싶어하고, 또 돌아가야만 하는 ‘자기 자신의 고유성’에 대해서 진지한 시선으로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돌아가려하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 ‘돌아가려고 하는 그 의지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직장이라는 이름의 배에 몸을 싣고 인간관계의 바다를 표류하기도 하고, 사회적 역할이라는 섬에서 잠시 동안 정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혹은 왜 떠났는지 잊어버린지 오래이고, 그냥 그대로 쉼없이 이동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부로부터 ‘우리 자신의 고유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소리는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가장 본질적인 소리이므로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로’가야 할지를 알 수 없게 된지 오래입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이타카라는 기다리는 장소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귀향 이라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더욱 멀어지고 있습니다. 돌아가야할 곳으로서의 ‘고향’은 더 이상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고만 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자주 이사와 계약서를 썼으며 누군가의 공간에 얹혀서 살았습니다. 고향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희미한 이미지가 된채로 앨범속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돌아간다’는 말은 심리적 위안으로서의 은유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이제 고향이나 공간으로서의 ‘집’이라는 단어는 마치 호텔 로비와 같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소비의 공간’이 되었고 이곳에서는 우리의 감정마저도 임대될 정도입니다. 제공되는 안락함에는 가격표가 붙어있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기억은 정돈된 인테리어에 맞추어 재가공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돌아가려는 하는 곳이 ‘우리 자신의 고유성’이 아니라 우리가 떠도는 이유를 잊기 위해서 그저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나 자신을 기다릴수 있는 시간이 머무는 곳, 관계에서 책임을 요구하고, 기억이 그 뿌리가 되는 곳으로서의 고향인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살아갑니다.
오디세우스는 그의 몸보다 앞서서 마음이 고향으로 향해 있었고 결국 그것이 기나긴 항해에서도 그를 이끌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분명 그런 마음의 고향이 있었고 그곳에 가 닿으려면 묻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 물음의 시작은 ‘지금 내가 잃어 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각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향으로서의 이타카가 아니라 고향에 대한 실존적 상상과 그 실천을 결단해내는 용기가 필요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