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앗싸들의책수다 #14] 성해나, 단편『혼모노』를 읽고

by 최은녕 라온나비


[앗싸들의 책수다 #14] 성해나, 단편『혼모노』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진짜'를 뜻하지만, 동시에 '진따'나 '괴짜'를 비꼬는 말로도 쓰이는 묘한 단어 '혼모노'. 성해나 작가의 소설 『혼모노』는 그 지독한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누군가를 '진짜'라고 부르고 싶어 할까요?




30년의 정진이 무색해지는 순간

문수는 평생 신을 모시며 살아온 박수무당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몸가짐까지 스스로를 단속하며 '영험한 무당'이 되기 위해 정진해온 사람입니다. 삼십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능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시며 이어폰을 낀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신애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신은, 30년을 바친 문수가 아니라 고작 햄버거를 씹는 그 아이를 택합니다.





나는 문수의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문수의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존경도, 분노도 아닌 부러움과 허탈함이 섞인 표정.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까지 살아온 걸까?"


이 물음은 자기비하가 아닙니다. 평생을 믿어온 방식이 통째로 흔들릴 때 나오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저는『옹고집전』을 떠올렸습니다. 진짜 옹고집이 있는데 가짜가 나타나고, 정작 진짜는 자기가 진짜라는 걸 증명하지 못해 집에서 쫓겨납니다. 진짜였지만 그 진짜됨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수도 그렇습니다. 삼십 년을 무당으로 살았지만, 정작 그를 '인간 문수'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몸주신은 떠났고, 남은 건 신빨이 떨어진 무당이라는 껍데기뿐입니다. 무당이 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워버렸는데, 이제 그 무당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신의 선택'이라는 일방적인 기준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살리에리의 자리, 그리고 '혼모노'라는 낙인

햄버거를 먹는 신애기를 보는 문수의 감정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보는 감정과 닮아 있습니다. 살리에리는 무능한 음악가가 아니었습니다. 성실했고, 제도 안에서 인정받는 궁정의 악사였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라는 '천부적인 진짜' 앞에서 그는 무너집니다.


'혼모노'라는 말은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을 향한 낙인처럼 작동합니다. 문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무형문화재라는 '공인된 진짜'가 되어 자신의 삶을 증명받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집착하면 할수록, 소설은 문수를 '진짜'가 아닌 그저 무당 흉내를 내는 가짜로 격하시켜 버립니다.






마지막 굿판 : 피투성이의 승전보와 그 뒤의 비웃음

문수의 마지막 굿은 처절합니다. 몸에서 오금이 당겨오고, 끈적한 피와 땀이 온몸을 적십니다. 지켜보는 이들이 경악할 만큼 처참한 몰골이지만, 역설적으로 문수의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해집니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진짜와 가짜의 구분까지 모두 가벼워집니다.


그는 지금 누구를 위해 굿을 하는 게 아닙니다. 평생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대리자'로 살았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혼을 태워 스스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작두에서 내려오지 않던 신애기가 나가떨어지고,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휘둥그레진 눈으로 문수를 올려다봅니다. 그 순간 문수는 말합니다.



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몸주신이었던 할멈에게, 그리고 자신을 부정했던 세상에게 던지는 단호한 승전보. 하지만 그 비장한 성취감 위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칼날처럼 박힙니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큭큭. 큭큭. 큭큭.



이 서늘한 웃음이 누구의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는 문수를 떠난 몸주신 할멈이 한 말처럼 느꼈습니다. 이 마지막 문장 때문에 문수가 도달했던 그 짧은 해방감은 산산조각납니다. 30년의 정성이, 목숨을 건 마지막 작두타기가 고작 흉내에 불과했다니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진정성이 절대자의 눈에는 그저 가짜의 몸부림으로 비치는 이 장면에서 저는 지독한 비장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진짜'를 가려내고 싶어하는 마음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진짜를 가려내는 이야기'라기보다 '진짜를 가려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정성은 언제부터 설명력을 잃었을까요?

노력은 왜 더 이상 보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진짜는 도대체 누가 결정하는 걸까요?


성해나 작가는 이 질문들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를 문수의 옆자리, 그 애매하고 불편한 자리에 오래 앉혀둡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도 작가를 다 만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건 불만이 아니라, 다음 작품에서도 내가 이런 복잡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게 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에 가깝습니다.






앗싸스런 질문 나누기

소설 속 문수의 처절한 굿판을 보며, 저는 여러분과 이런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1. 나는 지금 ‘잘 살아왔다’고, 그리고 지금도' 잘 살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2. 성실함이 더 이상 답이 되지 않는 순간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3. 자유롭다는 말이 가장 공허하게 느껴졌던 때는 언제였을까?


4. 내가 믿어온 노력의 가치는 언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을까요?


5. 누군가의 흉내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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