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마저 소비하는 시대

[앗싸들의책수다#16] 성해나, 단편『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읽고

by 최은녕 라온나비

[앗싸들의책수다#16] 성해나, 단편『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죄책감마저 소비하는 시대

성해나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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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뛰어난데, 사람은 문제적일 때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요.


성해나 작가의 단편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는 아동학대 논란을 일으킨 영화감독 김곤과, 그를 열렬히 옹호하는 팬덤 ‘길티 클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예술성과 도덕성의 충돌을 다루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죄를 둘러싼 감정이 어떻게 관리되고,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듭니다.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공동체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길티 클럽의 구성원들이 김곤 감독의 아동학대 사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선택합니다. 사건은 존재하지만, 언어로는 호출되지 않습니다. 불편한 진실은 부정되지 않고, 대신 철저히 발화 이전에 차단됩니다.


이를 위해 공동체 내부에는 여섯 개의 규정이 만들어집니다. 대화 캡처 금지, 사건을 연상시키는 단어 사용 금지, 감독에 대한 비판적 발언 금지, 질문이나 문제 제기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의 차단. 겉으로 보기에는 질서를 위한 규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규정들이 겨냥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언어와 사유의 가능성입니다.


여기서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전략이고, 회피가 아니라 체계입니다. 이 규정들은 말을 막는 장치이자, 감정을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합니다. 길티 클럽에서 금지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 범죄를 떠올리게 하는 질문입니다. 대신 허용되는 것은 해석과 소비, 그리고 ‘계속 좋아해도 된다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언어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동체는 공식적으로는 파벌을 만드는 ‘친목질’을 금지하면서도, 실제로는 특정한 말투와 해석, 암묵적인 태도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안전해지는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규정은 평등을 표방하지만, 그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중심과 주변이 갈리고, 발언권의 위계가 형성됩니다. 친목질을 막겠다는 규정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파벌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죄는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죄책감 역시 말해질 필요가 없는 감정으로 처리됩니다. 불편함은 제거되지 않지만,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되도록 침묵과 규정 속에 안전하게 보관됩니다.






죄책감의 유통 구조

길티 클럽의 구성원들은 감독과 영화에 대한 굿즈를 제작해 판매하며 수익을 얻고, 자신들조차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 장면을 반복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합니다. 이 해석들은 비판이라기보다 신념에 가깝고, 이해라기보다는 소속을 증명하는 언어처럼 작동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불편한 진실은 말해지지 않지만, 그 자리는 소비와 의미 부여로 빠르게 대체됩니다. 그 결과 죄책감은 느끼거나 말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상태로 처리됩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팬덤의 맹목성이라기보다, 죄책감이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침묵과 소비의 구조 속에서 유통되는 방식입니다.





사유를 잃어버린 언어

이 구조 속에서 화자는 점점 자신의 언어를 잃어갑니다. 김곤 감독이 사과하기 전, 화자는 길티 클럽에서 들었던 말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횡설수설하며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은 날카롭지도, 명확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화자가 스스로 사유한 말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주입된 언어를 그대로 되뇌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이미 윤리적 판단의 주체라기보다 관리된 감정의 전달자에 가깝습니다. 질문은 있지만 생각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펑’ 하고 터진 것은 회복이 아니라 공허였다

마침내 김곤 감독의 사과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순간 화자의 내면에서는 무언가가 ‘펑’ 하고 터지는 감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용서나 화해의 카타르시스로 읽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감정 관리의 구조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뒤늦은 인식의 붕괴에 가깝습니다. 사과는 이루어졌지만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고 신뢰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다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과는 모든 것을 정리해 주지 않고, 오히려 화자가 그동안 무엇을 외면하며 버텨왔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발톱과 이빨이 제거된 호랑이

소설 후반에 등장하는 ‘치앙마이 호랑이 만지기’ 장면은 이 구조를 상징적으로 완성합니다. 발톱과 이빨이 제거된 호랑이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안심한 채 다가가 만지고 사진을 찍습니다. 여전히 ‘호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본래의 힘과 위엄은 제거된 상태입니다. 이 호랑이는 도덕적으로 정리되었다고 여겨지는 김곤 감독의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위험하지 않게 관리된 존재, 그래서 마음 편히 소비할 수 있는 대상 말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 작가는 묻습니다. 위험하지 않게 만든 뒤의 폭력은 정말 더 이상 윤리의 대상이 아닌가. 죄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질문과 불편함이 제거된 것은 아닐지 되묻게 합니다.






분리는 면죄가 아니라, 사유의 거리다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는 ‘작품과 인간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단정적인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분리는 면죄가 아니라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일 뿐이라는 점을 조용히 환기합니다. 문제는 분리 이후의 태도입니다. 분리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소비한다면 그 분리는 비판이 아니라 안심을 위한 장치가 됩니다.





좋아함 이후의 윤리

이 작품이 독자에게 남기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좋아함 이후에도 우리는 책임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는 죄책감마저 관리하고 소비하며 불편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소설은 불편함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불편함을 끝까지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 앞에서 독자가 스스로 질문을 멈추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는 단순한 팬덤 비판을 넘어 현대 사회의 윤리 감정 구조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문제작으로 남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앗싸스런 질문들

1. 길티 클럽에서 금지된 것은 범죄였을까요, 아니면 질문이었을까요?


2. ‘친목질 금지’ 규정은 왜 오히려 파벌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을까요?


3. 좋아하는 대상의 죄책감을 함께 느끼는 것은 연대일까요, 자기 위안일까요?


4. 김곤의 사과 장면에서 화자의 ‘펑’은 용서였을까요, 각성이었을까요?


5. 발톱과 이빨이 제거된 호랑이를 우리는 왜 안심하고 만질 수 있었을까요?


6. 작품과 인간을 분리하는 태도는 언제 성찰이 되고, 언제 면죄가 될까요?


7. 우리는 혹시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 윤리를 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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