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싸들의책수다 #19] 이희영,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당신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름이 있나요?
청소년 소설은 종종 성장의 이야기로 읽히지만, 이희영 작가의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성장 이전에 먼저 묻습니다
우리는 상실을 어떻게 견디는가
그리고 기억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가.
이 소설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던 날, 엄마의 눈물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십여 년 전 세상을 떠난 형과 닮아가는 동생 혁이의 모습은 가족이 봉인해 두었던 시간을 다시 흔듭니다.
이 집에서 형의 이름은 거의 불리지 않습니다. 슬픔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가족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하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관계를 고립시키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그 조용한 틈을 천천히 비춥니다.
혁이가 형을 잃은 건 겨우 다섯 살 때였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함께한 기억도 거의 없었습니다. 추억이 없으니 그리움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형의 나이가 되어서야, 혁이는 처음으로 형이 궁금해집니다. 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살아 있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거의 사람이었던 형이, 어느 순간 미래의 나로 겹쳐집니다.
기억도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소설은 그 낯선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답합니다. 가능하다고. 우리는 기억이 없어도,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어도, 뒤늦게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다고.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은,
타인이 아닌 낯선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인 것 같아." (p.121)
혁이는 형이 남긴 가상공간과 주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형의 모습을 하나씩 마주합니다.
엄마가 기억하는 아들,
친구가 기억하는 형,
선생님이 기억하는 학생.
그 모습들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진실입니다.
소설이 비유한 '부조'처럼 우리는 타인의 한 면만을 보고 전체라고 믿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조용해지는 이유는 아마 자신도 누군가에게 한 면으로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 속 메타버스 공간은 단순한 장치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말하지 못한 마음을 가상 정원에서는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 공간에서 혁이는 형을 다시 만나고, 동시에 자기 자신과도 마주합니다.
결국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입니다.
세상은 종종 말합니다. 가슴에 묻고 보내주라고, 빨리 잊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조용히 반문합니다. 왜 잊어야 하는가.
혁이네 부모님은 형의 방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곰솔은 11년간 혼자 정원을 지켰습니다. 혁이는 형의 넥타이를 매고 학교에 갔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누가 옳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속도로 그를 기억했을 뿐입니다.
"형을 지워야 할 필요도, 억지로 잊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누군가를 잊는다는 건,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이다.
바위가 비바람에 조금씩 깎이고 닳아 없어지는 것처럼." (p.197)
이 소설이 말하는 애도는 잊는 일이 아닙니다. 기억하되,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찾는 일입니다.
혁이는 형이 죽던 날 이후 귤을 멀리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서 그는 다시 귤을 입에 넣습니다.
신맛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맛을 견딜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도란 잊는 일이 아니라 삶 속에서 관계의 자리를 다시 놓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기억한 채 살아가는 법, 이 소설은 바로 그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책은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봉인해 두었나요. 당신이 아직 삼키지 못한 '여름의 귤'은 무엇인가요.
"무언가를 기다릴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뭐든 행복하고 좋은 거야." (p.124)
성장은 슬픔이 끝났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이 소설은 그 첫걸음을 조용히 건넵니다.
1. 나는 관계 속에서 어떤 '보호색'을 입고 살아가고 있나요?
2. 누군가 나를 단 한 모습으로만 판단했을 때, 억울했던 경험이 있나요?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다른 면은 무엇이었나요?
3. 혁이네 부모님, 곰솔, 혁이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형을 기억합니다. 나에게도 나만의 애도 방식이 있나요?
4. 나는 누군가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나요? 그리고 그 사람은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소금 아이》 이희영 — 타인의 시선과 편견 속에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소년의 성장을 통해 인간의 다면성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몬드》 손원평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타인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이, 부조 너머를 보려는 혁이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경혜 — 죽은 친구의 일기를 읽으며 그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과정이 이 소설과 결이 비슷하여, 애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기억 전달자》 로이스 로리 — 슬픔과 고통을 봉인한 완벽한 사회가 과연 행복한지 질문을 던지며,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지만 가치 있는 일인지 일깨워주는 고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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