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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May 19. 2020

기다리는 글

아는 것 이상으로 글을 쓰고 싶은 유혹을 자주 느낀다. ‘아는 척 글을 쓴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책 리뷰랍시고 여기 써둔 글 곳곳에 그런 유혹에 넘어간 흔적들이 보인다. 나는 18년전 이 나라에 처음 왔을 때부터 좋은 영어 표현, 즉 원어민만 쓸법한 프레이징을 메모해두는 습관이 있는데, 한 곳에 모으면 최소 책 한권 분량에 이를 이 성실함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언어를 옥죄고 결국은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문맥에서 떨어져나온 파편적 활자들이 언어의 본질인 자기표현을 선행하기 시작했던거다. 말하자면 난 메모해둔 걸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글을 쓰고 말을 해왔다.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말을 뱉고 그를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말을 이어간다. 그러다보면 프리스타일 랩처럼 말 같기도, 아닌것 같기도 한 문장이 완성됐다. 영어로 쓴 걸 다시 일어로 옮기며 자신만의 문체를 완성했다는 하루키만큼이나 참신한 접근이었으나, 그 결과는 반대였다. 나는 관용어구와 숙어, 재치있어 보이는 단어 따위를 얻기 위해 정확하고 담백한 자기표현의 기회를 내어주며 살아왔다.


얼마전 쓴 책리뷰도 비슷했는데, 책을 읽으며 메모해둔 게 아까웠는지 어떻게든 다 써먹으려고 레고조립하듯 글을 썼다. 그러니 글쓰기란 결국 배제하는 작업이란 말이 옳다. (사실 방금 전까지도 예전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서에서 본 ‘지(知)의 총체’란 표현을 쓰고 싶어서 어떻게 좀 안될까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는데,) 결국 덜어낸 만큼 진정한 의미에서의 말하기가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도 했고 저런 생각도 할 수 있다고 온세상에 선언하고픈 이 배고픈 자아에 대한 자기부인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요즘 ‘기다리는 글쓰기’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와 충만할 때, 잠시 멈추고 메모만 해두려 애쓴다. 그렇게 묵혀두고 시간속에 흘러가게 내어두면 지나가던 엄마의 한마디, 전혀 무관해보이는 주제의 책에서 눈에 띄는 한 구절, 이런 것들이 돌고 돌아 책과 만나 두터운 삶이 됨을 경험한다 – 이제 추수할 때가 이르렀단 뜻이다.


얼만큼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고, 그걸 남들에게 내어놓을 수 있을지, 그 답은 본인만 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유별난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너도나도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어 내는 이 무한복제의 시대에, 온전히 오리지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 속 깊은 곳을 한번 거쳐 올라온 글을 쓰고 싶다. 그 결과물이 이정도 수준인건 참담하지만 어쩔거냐. 적어도 내 양심은 편하다. 요즘 인간의 뇌는 평균 12초에 한번, 27.5분 사이 120번 새로움을 찾아 옮겨다닌다는데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당신, 복 많이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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