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함으로 풍성해지는 삶에 대해
나에겐 오래전부터 규명해 내고팠던 마음의 풍경들이 있다. 마음 잡고 앉아 글로 포착해보려 노력한 적도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않는 노트에 쓰는 것 마저도 쉽지 않아 내버려 둔 마음들 – 가령 나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 후 헤어져야 할 때가 오면 어떤 그럴듯한 작별인사로도 그 아쉬움을 표현하기가 ‘한 없이 모자랄 것 같아 야속한’ 느낌을 종종 받곤 하는데, 그래서 결국 ‘어 그래, 잘 가고..’ 정도로 싱겁게 끝내버려 내 속을 모르는 상대가 되려 무안해진다던지. 또 어쩔 땐 속으로 정말 좋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차가울 때가 있는데, 이 마음은 헐겁게 표현하자면 ‘내가 그를 아끼는 마음을 그가 아는 것이 싫음’이다. ← 보다시피 몇 번이고 고쳐 쓴 문장인데도 여전히 분명치가 않다.
우리 뇌가 데이터로 다운로드 가능해진다면 나는 그걸 카피하여 이 책의 작가님께 보내고 싶다. 대신 글로 표현 좀 해주시라고. (물론 아마 그게 가능해질 때쯤 인류에게 인식의 수단으로써의 글은 더 이상 필요 없을 테지만!) 요즘 나는 문학을 멀리한 내 20대의 시간을 후회한다. 빈곤한 언어로 인식할 수 있는 삶은 찰나의 감각 그 이상일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에. 바꿔 말해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에게 삶의 모든 순간은 책이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폴 발레리가 프루스트를 평가하며 사용한 ‘무한정 분할할 수 있는 감각’은 ‘집요함’과 동의어가 아닐까. 재개발 중인 아파트 단지에서 남겨진 것들의 이후를 상상하며 느낀 서글픔, 마음처럼 부모님께 다정하지 못해 뒤돌아서며 느끼는 그 간질간질한 불안함.. 어쩜 하나같이 내 맘 같은 글들을 읽어나가며 그런 집요함을 통해 지금보다 풍성해질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뜻하지 않은 내 삶과의 접점도 반가웠다. 들고양이를 데려와 키웠던 경험이라던지, 어깨의 흉터 같은 것들 – 나에겐, 7살 때쯤인가, 소말리아 어린이들을 위한 ‘사랑의 빵’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빼내려 연장질을 하다 얻은 왼쪽 엄지와 약지 사이 큰 흉터가 있다. 몸에 일부가 되어 나와 함께 살아왔음에도 무감각해있던 이런 기억들에 글로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싶단 마음이 생긴다.
산문이나 회고록은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이런 친구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느껴지면 책으로서 성공한 거다. 친구들 중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지 모르게 해주는 세련된 화법의 소유자가 있는가 하면 눌변으로도 내 마음에 와 닿는 법을 아는 친구가 있듯 산문을 읽을 때 문장의 탁월함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저자의 삶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올리버 삭스나 폴 칼라니티의 책으로 계속 돌아가게 되는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공을 거뒀다. 각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하다’라는 타이틀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글을 먼저 읽은 후 무슨 마음일까, 헤아리며 두근거림으로 이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