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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연주와 영화 미나리, 그 흥미로운 담담함

파리의 우버 운전사

조성진의 연주와 영화 미나리, 그 흥미로운 담담함.



어제, 3월 1일은 쇼팽의 생일이었다.

아침 라디오 클래식에서는

쇼팽 음악이 흐르며,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며칠 전, 일을 시작할 때

우연히 라디오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무심코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생각났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한 번도 조성진의 쇼팽 결선 연주를

진지하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5년에 우승했으니 5년이 지났는데...

한 번도 제대로 그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바로 조성진의 쇼팽 결선 실황 연주를 들어보게 되었다.


쇼팽 피아노 콩쿠르는,

매년 열리지 않는다,

올림픽이나 월드컵도 4년에 한 번은 열리는데,

쇼팽 콩쿠르는 5년에 한 번씩 열린다.


전 세계에서 최고의 인재들이

연주를 담은 음원을 보내 예선을 치른다.

지역별 예선으로 거쳐 여러 차례의 본선을 지나,

결선에 오른 연주자들은 폴란드에서 열리는 파이널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게 된다.

결선곡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오케스트라와 리허설 없이

협연을 하면서 결선 경쟁을 하는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연주를 보고 점수를 매긴다.

만점은 단 한 명의 연주자에게만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첫 번째 주자로 나서는 후보가

불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 만점을 한 명에게 밖에 줄 수 없으니 ,

자연스레 초반의 연주자들에겐 인색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조성진은 그 '첫 번째 연주자'였다.



2015년 실황을 처음들은 것은 밤이었다.

박수소리가 잦아들고

1악장이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이어지고 피아노가 들어섰다.

처음부터 깔끔했고 흥미로운 연주였다.

그리고 2악장에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요 녀석 봐라"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최고는

1885년에 우승한 스타니슬라브 부닌의 연주 실황이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나의 인생의 첫 스승이었던 서점 아저씨 덕분에

부닌을 알게 됐었다.


LP음반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쇼팽 하면, 녹턴 정도 알던 내가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처음 들었을 때의 그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신선했다.


정말 아름다운 곡이었고, 멋진 연주였다.

1악장은 그 어떤 연주보다 '명징'했고, (명징明澄 :깨끗하고 맑다)

2악장의 그 부드러운 선율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그려놓을 수 있을까?

신기할 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쇼팽은 나의 느낌엔 그저 '병자', '아픈 사람'이었다.

인생이 사랑으로 아팠던 사람.


올해로 쇼팽 죽은 지 172년이 된다. (1810년 3월 1일 생)

나에게 쇼팽의 음악은 그 어떤 발라드 가요나 사랑 드라마보다 위대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발라드, 어떤 드라마도 172년 동안 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조성진 연주는 흥미로웠다.


우선, 너무나 깔끔한 연주였다.

세계적인 콩쿠르 결선인데 실수가 말이 되나?라고 물을 수 있겠지만

2010년의 결선 무대 우승자의 연주를 보면 1악장에서 마구마구 실수가 나온다.

물론 당시엔 우승자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었다.


아무리 세게 적인 콩쿠르 결선이지만

40여분짜리 곡을 실수 없이

정확하게 연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한한 연습도 필요하고 또 운도 따라야 한다.


빙상의 여왕이었던 김연아도

늘 트리플 액셀에서의 일단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목표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완벽한 기술'은

'필요조건'이긴 해도 '충분조건'은 아닐 것이다.


'완벽한 '기술'이 기본이고

또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

바로 '주눅 들지 않는 배짱'이다.

이것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1악장을 완벽하게 연주한 조성진은 2악장,

그 예의 부드럽고 로맨틱한 부분에 이르자

너무도 담담하게 연주를 한다.

얼굴은 곱상한데 어린 내기가 아니었다...


조성진의 연주를 진지하게 듣고 난 후

나는 역대 우승자들의 연주를 모두 들어보았다.

앞서 언급한 2010년 실수 많은 영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부닌,

그리고 부닌보다 유명한 폴란드 출신의 크리스티안 짐머만

지휘자로도 유명한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정말 드라마 같은 인생 스토리를 거저 우승한

베트남 피아니스트 '당 타이 선'도 있었다.

모두 너무나 멋진 연주들이었다.


당 타이선의 연주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한 음, 한 음을 소중히 치는

피아니스트는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전 중인 베트남에서 피난을 다니며 연습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피아노도 없이 그려진 건반 위에서 연습을 했고,

옷도 없어 빌려 입고 출전했다는 당 타이 선.

그래서일까, 그가 선택한 결선곡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아닌, 2번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느낌엔 협주곡 1번은 '첫사랑'의 드라마 같았고

2번은 좀 더 '성숙한 남자'의 러브스토리 같았다.

그렇게 드라마 같은 인생을 겪은 피아니스트에게

'첫사랑'의 감미로움보다는

화려하지 않으나 '성숙한 깊이'가 있는

2번이 더 연주하고 싶지 않았을까? 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늘 현대 미술가나 예술가를 설명할 때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작품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작가의 삶을 보면 됩니다."

그랬다. 당 타이선의 연주는

그래서 더 한음 한음이 소중하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과연 조성진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조성진의 연주는 무언가가 달랐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랄까,

정확하게 악보대로 치는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박자에 살짝 어긋나 있다고 해야 할까..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무슨 용어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살짝살짝 뜸을 들이다 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악장부터도, 정확한 연주 내면에 무언가 살짝

'이건 다르다, 다르네'라고 느껴졌던 것이 딱 이런 부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경계에 서있는 느낌.

뭔가 원래 쳐야 할 지점에서 벗어나려는듯한 느낌?


무척 흥미로왔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으며,

듣자마자 차이가 느껴지니까 좋기도 했다.


그렇게 흥미로운 1악장이 끝났다.

물론 1악장에서 줄달음쳐 올라가는 부분이나

또다시 줄달음쳐 내려오는 부분,

전문 용어는 알 수 없지만,

내 방식으로 표현하면,

마치 은쟁반에 은구슬을 확 쏟아부었을 때의 느낌처럼

유려하고 또렷한 또로로 록 소리가 이어지는 부분은

기술적으로 정말 멋진 연주였다.


늘 다시 들어도 신기했다.

어떻게 손가락이 저렇게 움직일까..

극도의 긴장과 유연함이 어마어마한 탄력으로 연결되어있는..

정말 미스터리였다.


그리고 2악장으로 넘어가서 느리게 시작하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부분이 들어서자


음..

조성진은

감정적이지 않게 아주 건조하게 치고 있었다.

그대 목에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온 것이었다.

"요 녀석 봐라"라고.


1악장에서 살짝살짝 어긋나려던

그 박자와 살짝 어긋남이

더 노골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슬픈 부분인데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담담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이 어린 녀석이..

내가 머리부터 그렇게 신성일 머리 할 때 알아봤지만...

이렇게 조숙할 줄이야...

세계 최고의 피아노 콩쿠르 결선에,

그것도 첫 주자로 서서 어떻게 이렇게 배짱이 있을 수가...


그 순간에 다 이해가 되었다

이 아이가 우승할 수밖에 없었겠다..

이렇게 치는 사람 잘 못 본 것 같다.

바로 조성진의 연주였다.


악보를 정확히 연주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막 빠른 부분 보면 어느 부분 하나 틀리는 데가 없는,

기술적으로 완벽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악보 위 허공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의 연주..


예전에 철학자 김영민은, 철학자들의 토론을 두고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고수들처럼..'이란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조성진의 연주가 그런 느낌이었다.

악보를 따라 걷는데 허공을 걷듯이 자유로운 느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을 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달리며 내내 들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한 달 가까이 들은 것 같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우선 생각나는 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연습을 하고

연주할 때는 모두 놓아버리는 것일까? 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조성진 인터뷰에서 그런 대목이 나오기도 했다.

연주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으니


"연주를 할 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난다"라고 답한 것이다.


예전에, 피카소 미술관 한 벽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생각(고민)하고, 한 시간 만에 그린다.”


그렇게 보면 연습은 참 구체적이지만

연주는 참 추상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조성진 연주에는 그런 게 있어 보였다

그대로 연주하는 것 같은데.

어딘가 다른..

배짱 같아 보이기도 했고

음악을 완벽하게 연습해놓고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암튼.. 이 녀석이 아이가 아니네.. 했다


어떻게 보면 쇼팽의 2악장은

감정에 빠져 쳐지고 질척 데기 쉬운 부분이었다.

소위 감상적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이 충분했다.

그런데 조성진이 연주한

2악장의 서정적인 부분은

참으로 담백했다


네가 사랑을 뭘 알겠니?라고 말할 수 도 있지만

그냥 왠지 조성진의 연주는 질척대지 않는

사랑이라는 낭만에 허우적 대지 않아서 좋았던 것이다.


많은 젊은 친구들 연주를 들으면

오만 인상을 쓰면서, 그 쇼팽이 적어놓은

그 첫사랑의 쓰라린 추억에 다가가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런데, 그게 어디 기를 쓴다고 되는 것인가?

사랑은 배우는 게 아니라,

그냥 아파야 하는데...


그런데 조성진의 연주엔

그런 불완전한 낭만은 없어 보였다

그냥 담백하게...


마치,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라흐마미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같았다.

세상 좋아져서 유튜브를 통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음질은 안 좋지 않지만,

작곡가가 직접 연주한 곡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 연주에서도 2악장에 그 아름다운 슬픈 부분을

라흐마니노프는 정말 세상 담담하게 연주한다.

처음 그 연주를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아.. 작곡가 자신이니까 이렇게 담담할 수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이번에 들은 조성진의 쇼팽 결선이 그런 연주였다.

어린 녀석이 참 담담하네…


미나리라는 영화 있다.

오스카의 수상이 유력한 윤여정 선생이 여우 조연으로 나온 영화.

윤선생께서 그 영화에 대해서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과거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데,

과거에 빠져서 질척대지 않아서 좋았어요”라고


나도 미나리를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굉장히 슬프고 아쉽고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의외로 담백하다..라고..

정이삭 감독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시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담담함인가?


어쩌면 조성진의 연주는

쇼팽 자신이 아님에도

아니 어쩌면 쇼팽이 아니어서

그렇게 담담하게 연주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철든 쇼팽 같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연주를 듣다 보면

세부류의 연주자들이 떠오른다.

첫째, 악보 작곡가의 기세에 눌려있는 연주

둘째 악보 작곡가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주도권을 잡은 연주

셋째 작곡가의 기세를 넘어서 있는 연주

조성진의 쇼팽 결선의 연주는 그랬던 것 같다.


한 가지 생각난 것이 있다.

조성진의 우승 연주를 두고

프랑스의 한 심사위원이 1점을 주어서 논란이 됐었다.

파리 고등 음악학원의 파벌싸움이라는 등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음.. 외국학교에도 계파는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참 뒤끝 작렬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1점을 주나..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당시 연주를 진지하게 듣고

살짝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조성진의 이런 배짱 어린 연주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정말 싫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데

아무런 근거 없이 내편이 아니라고

1점을 주는 건 너무 유치한 행동이다.

그 사람에게도 1점을 줄만한 확신이 필요했을 텐데..

그게 무언가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을 때,

이런 배짱 있는 연주,

젊은 대가의 곡해석에 대한 반감?

뭐 이런 게 있을 수도 있었겠다..라는 상상이 든 것이다.


얼마 전에 모차르트의 미 발표곡이 최초로 발표되었다.

아주 짧은 곡이었고, 그 초연을 한 사람은

바로 조성진이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쇼팽을 들으며 정리했던 생각이 났다.

‘악보데로 완벽하게 연주할 줄도 알면서

그위를 걸을 줄도 아는 배짱이 있는 연주자

그러면서도 ‘오버’, 그러니까 과하지는 않게

늘 경계에 아슬아슬 걸쳐있는..

그게 딱 조성진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세상 초연이라는 곡 앞에도 주눅 안 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오래도록 좋은 연주자로 남기를 바란다.



파리의 우버 운전사


*조성진 모차르트 초연

https://www.youtube.com/watch?v=AHsIG77Ik10





*1985년 스타니슬라브 부닌의 연주실황

https://www.youtube.com/watch?v=FOPQn17s5hs


**그리고 조성진의 결선 연주실황

https://www.youtube.com/watch?v=614oSsDS734


***당 타이 손의 결선 2번

https://www.youtube.com/watch?v=9DBo0j9xlwc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2번

https://www.youtube.com/watch?v=pBx-tr1FD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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