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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독, 예술가의 고독 그리고 베토벤의 자화상

파리의 우버운전사

인간의 고독, 예술가의 고독 그리고 베토벤의 자화상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Op. 61, 1806년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곤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화상'이라고 부른다.

고흐도 그렸고 또 램브란트 더 거슬러 올라가면 뒤러도 있었다.


자화상은,

어쩌면 시각예술가들 

그러니까 화가나 조각가들이 가진 특권인지도 모른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적 예술이니만큼, 

얼굴을 그리거나 형상을 만들어 자신의 모습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비단 화가들 뿐 아니라, 조각가들 역시

자신의 형상을 두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비운의 조각가였던 권진규가 그러했고,

또 다른 비운의 조각가였던 카미유 클로델은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로댕의 두상을 남기기도 했다.


시각예술이 아닌 다른 분야라면 어떨까?

문학에선 자서전으로 자신의 삶을 남기고,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적어두기도 한다.

그런데, 소리가 작품이 되는 음악은 어떨까?

미술가들이 남기는 자화상이나

문학가들이 남기는 자서전 같은,

자신에 대한 작업이 있을 수 있을까?


이 곡,

이 곡을 듣던 지난 2월 어느 날 문득,

'아. 이 곡의 2악장은 작곡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귀로 듣고 있는데, 마치 작곡가의 모습을 보는듯한 생각이 드는,

바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번호 op 61.


영화 '더 콘서트' 덕분에 바이올린 협주곡을 좋아하게 된 나는 

영화 '더 콘서트'에 등장했던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한동안 열심히 듣다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알게 되었다.

늘 주요 선율만 어렴풋이 알던 곡은

들으면 들을수록 좋았다.

차이콥스키는 여전히 광활한 러시아 대륙이 느껴지는 웅장함이 있었고

베토벤은 늘 그렇듯 아름다운 건축을 올라가듯이 장엄함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여러 번 듣던 중 

베토벤의 2악장이 무척이나, 또 너무나 불현듯 하게, 

'고독하고 적막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작업을 하다 보면, 때때로

몸서리쳐지게 고독한 순간이 오곤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자유롭게 하는 창작이라는 행위에 

늘 자유로움만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한 자유로움은 반대로 말하면 

모든 결정을 혼자 내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종종 그런 철저히 혼자인 순간은

몸서리치게 서럽고 또 외롭다.


그 베토벤의 2악장에선 그런 고독이 느껴졌다

독주 악기인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은 마치 작가의 한숨처럼 들렸고,

주인공 바이올린이 단출한 협주를 동반한 그 2악장의 모습은

영락없이,

미친 듯이 장엄하고 화려하며 완벽하게 아름다운 1악장을 지어 올린(작곡한) 베토벤이

잠시 숨을 돌린 사이 

책상에서 미친 듯이 작곡하던 자신의 모습을,

홀로 촛불 앞에 앉아 앞에 어른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내가 뭘 하고 있었지?

난 왜 혼자인 거지?

나는 왜 이러고 있지?"

라고 되묻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런 장면은 비단 작가들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살면서 몸서리치게 외로운 순간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언젠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들으며

'아.. 이건 아버지의 고독이란 생각이 든다..'라고 적은 적이 있었다.

베토벤을 엄하게 교육시켰다는 아버지.

베토벤은 자식이 없었으니 아버지의 감정을 그렸다고 할 수 없지만

왠지, 아버지, 남자의 고독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니 한 작가의 고독에 앞서 한 인간의 고독인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음악이나 문학 그리고 미술로부터

어떤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살았던 순간을 그 작품 안에서

다시 만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홀로 그 고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누군가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을 만나

그 길에서 만들어진 작품을 만나

함께 걷는 것은

조금이나마 위안이 아닐까..


그래서 난,

늘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에선 눈물이 나면서도 위로가 되었었다.

베토벤의 외로움이 보여서 눈물이 났고

또 똑같이 외로운 나 자신이 보여서 위로가 되었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외로운 길을 

베토벤의 손을 잡고 걷는 것 같아서 또다시 위로가 되었다.


베토벤은 베토벤이었다.

2악장은 쉬는 시간 없이 3악장으로 넘어간다.

쉴틈 없이 바로 3악장의 빠른 전개,

다시 1악장에 짓기 시작했던 작품이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잠시 쉬긴 했지만

고독을 돌아보긴 했지만

멈추지는 않는 것

이것이 베토벤의 모습이었다.


나는 차이콥스키와 베토벤 협주곡을 모두 쥴리아 피셔의 연주로 들었다.

얼마 전 운행 중에 한 손님이 내리시며, 

"쥴리아 피셔, 좋은 선택이에요!"라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쥴리아 피셔를 아시냐고 내가 반가워 되묻자

자신이 음악가라고 답했다.


어쩌다가 쥴리아 피셔의 연주를 듣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나쁘지 않았다.

모두 교과서 같은 연주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정확하고 깔끔한 그녀의 연주가 내겐 제일 편했다.


참고로 베토벤 협주곡 2악장의 자화상은

흥미롭게도 작곡가가 자신의 모습을 오선지에 그려놓은 것인데

정작 그리는 사람은 연주자이다.

왜냐하면, 악보가 연주되어 음악이 되는 것은 연주자의 손을 거쳐야 하니 말이다.

언젠가 음악은 '그려진 빈 캔버스 같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한번 그 생각이 들었다.

작곡가가 오선지에 그려놓고, 다시 연주자가 그위에 그림을 그리는..


그래서 2악장의 연주를 보면, 연주자가 그리는 베토벤의 모습이 느껴진다.

쥴리아 피셔가 그린 베토벤은, 

두 아이의 엄마처럼 베토벤을 엄마의 입장에서 보고 그린 것 같았다.

반면 파트리시아 코파친스카야의 연주는 

당돌한 그녀의 성격처럼, 당차고 젊은 베토벤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그 외에 다른 연주들은

음.. 이자크 펄만의 연주는 자신의 모습 같아 보였고

또 다른 많은 연주들은 아직 다 들어보지 못했다.

때론 아무 생각 없는 연주를 만나기도 한다.

일단 1악장에서 너무 느리면 아무 개념이 없어 보였다.

의지도 목적도 없어 보이는 것이다.

베토벤은 한순간도 치열하지 않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치열함이 있기에 2악장의 고독의 깊이는 더 깊어지는데

1악장이 치열하지 않으면 2악장은 그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이 글을 쓰며 들은 클라라 주미 강의 연주가 그랬다.

https://www.youtube.com/watch?v=pY-aFk-Ssr0


베토벤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세상에 많은 힘든 일상과 싸워나가는 사람들에게

덜 부끄러울 수 있다.

그 목숨을 건 고독의 순간을 지내야

적어도 창작을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파리의 우버 운전사


* 쥴리아 피셔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ZrpBU-Jww38



*파트리시아 코파친스카야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xr9KmgDFwMc


*이자크 펄만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cokCgWPRZPg


베토벤의 산책 #01

*작업 중인 베토벤의 산책

여러 번 망치고 또다시 그리기를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늘 그렇듯 답이 나올 때까지

베토벤과 함께


베토벤의 산책 #02

그림은 계속 변한다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르니 난 아직 한참 멀었다...

그저 계속 걸을 뿐.. 본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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