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본 세상
(매춘을 권하는 사회 중에서...)
아이돌(Idole)을 보호해야 한다.
먼저, 아이돌(Idole)을 보호해야 한다 아이돌(Idole)을 보호해야 아이들이 보호된다. 무협지에서 독침을 맞은 주인공을 치료하는 의원은 독초의 ‘십보(十步)’이내에 해약이 있다고 말한다. 맞다. 이 상황의 해결책 또한 그 분묘 안에 그 ‘상상계’ 안에 그 미디어 안에 존재한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듯이 그 안에서 부수어야 한다.
아이돌(Idole)의 보호가 문제 해결의 한 시작이다. 아이돌(idole)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을 잠깐이나마 깨울 수 있다.. 19금의 허상 속에서 발음하기조차 낯선 청소년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아이들의 겹겹으로 싸여진 허상을 깨는 방법 역시 그 안의 텔레비전 안의 미디어 세상에 있다. 그 한 예가 ‘예능’이다. ‘예능’은 언젠가부터 미디어 속의 허상들에겐 ‘통과의례’처럼 되어왔다. ‘예능’역시 ‘짜맞춘 각본’에 의해 움직일 테지만 때때로 예기치 못한 “상상계”와 “상징계” 의 틈바구니를 현실을 살짝 드러낸다. 예능 프로에 나오는 아이들은 미니스커트와 요염하게 치장되어 있지만 한결같은 순박한 고등학생들이다. 미쓰 에이의 수지는 뮤직비디오에선 요염한 여성이지만 예능에서 입을 열면 순진한 소녀다. ‘힘들었다.’며 우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애다. 그렇게 그 존재의, 실제의 모습이 살짝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능이 그 틈새를 알아 체고 다시 ‘각본’으로 돌아가면 그들의 실체는 다시 사라진다.
따라서 연출가들 피디들의 역할이 중요해 진다. 지각 있고 양심 있는 이들의 연출이 관건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크다. ‘나는 가수다’로 ‘공정한 게임’을 갈망하는 대중의 요구를 드러내 보인 ‘쌀집 아저씨’ 김영희는 자신이 ‘피디(PD)’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사회를 바꾸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맞다, 그들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 효과는 크고 빠르며 재밌다. 오래전 ‘이경규가 간다’는 사회적 양심을 부채질 했었다. 인문학 도서 100만권을 무상배포 하느니 강호동이나 유제석을 교육시키는 편이 빠르다. 윤동주에 얽힌 비화를 문성근의 입을 통해 ‘무릎팍’에서 듣는 것은 현대사에 관심 없는 대중에게 가장 탁월한 교육이었으며, 한비야의 입을 통해 100원의 가치와 세계의 참상-정확히 ‘분묘’ 바깥의 실제 세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였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안철수를 만든 것도 ‘무릎팍’이며, 지난 대선구도를 정리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도 ‘힐링켐프’였다. 이들의 영향력은 더 막강해 질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이유로 메르캉틸리즘의 마수가 곧 덮치거나 이미 스며들고 있을 것이다. 이미 거의 종속되어버린 이탈리아처럼 되지 않으려면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새 삼켜져 버릴 것이다.
문화산업의 고삐를 죌 수 없는 것은 이미 사회의 고삐가 풀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그 문화를 낳는다. 우리의 사회가 이미 매음굴이 되어버린 이상, 가장 화려한 홍등가는 영악한 후기 자본주의를 포주로 두고 있는 미디어를 위시한 문화 산업인 셈이다. 따라서 이 매음굴이 단속이 필요하다면 미디어를 잡을 일이 아니라 그 사회를 먼저 보아야 한다.
아이돌(Idole) 과 거대한 분묘(墳墓) 그리고 자발적인 순장(殉葬)
아이돌(Idole)이 있다. 아이돌(Idole)은 이러한 스팩터클들의 주인공이다. 합법적인 제물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eidôlon , 그 뜻은 ‘죽은 자의 유령’이다. 정확하다. 허상인 것이다. 대중들이, 소녀들이 만나는 훈남, 꽃 미남은 철저히 이미지에 둘러 싸여있는 가상의 존재이다. 즉 죽은 허상이 된다. 그들도 화장실을 갈 것이고 입 냄세 나는 아침을 맞이할 테지만 그것들은 철저히 가려져 있다. 더러움이나 악함은 전혀 없는 순진 무결한 결정체로 소녀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들이 울면 소녀들은 같이 울고 웃으면 같이 웃는다. 꽃다운 미녀들 또한 마찬가지다 허벅지를 다 내놓은 섹시한 그들에게서는 어떤 추한 모습도 연상되지 못한다. 아름답거나 섹시한 부분 이외의 다른 부분도 철저히 감추어져 버린다. 철저히 미적인 루브르의 비너스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팔 없는 비너스가 아닌 총천연색의 여신이 되어 몸을 드러낸다.
과거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이란 모두 무덤을 장식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말이다. 모두 죽은 자의 영생을 위하여 무덤을 꾸미고, 그를 위해 제사와 제례를 벌인다. 바로 원시 사회의 분묘(殉葬)와 제사(祭祀), 바로 원시사회의 스펙터클이다. 마치 오늘도 같지 않은가? 죽은 자와 같은 속이 텅 빈 아이돌(Idole)을 세워두고 온갖 치장과 잔치를 벌인다. 과거의 흑백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이장님의 집으로 모여야 했지만 이젠 이런 풍경은 온 세상에 퍼져 있다. 집집마다, 방방마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컴퓨터 화면이 아니면 작은 휴대폰으로 아이패드로 우리는 그 속에서 활보한다. 우리의 정신줄을 그 속에 놓아버린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의 진단은 너무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제 디카프리오가 해매던 ‘인셉션’에서처럼 현실에서 도피하여 미디어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모두 잠을 청한다.
세상은 거대한 분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 거대한 분묘로 걸어 들어간다. 자발적인 순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랬다. 순장(殉葬)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를 같이 묻었다던 그 고대의 ‘순장’이 이제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은 현실보다 화려하고 고통 또한 없으며,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만큼 자극적이다. 그 분묘로 입장할 수 있는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기기만 있으면 된다. 그런 기기가 없거나 그 체제가 파괴된 사회에 있는 이들,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거대한 미디어라는 분묘를 지각하고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분묘 속을 방황한다. 현실의 파괴로 그 가상의 공간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속을 나오지 못한다.
한국사회는 가장 자극적이고도 성적인 분묘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허술하기까지 하다. 성찰 없는 법망은 자신의 사이트에 신체를 드러내는 행위에는 처벌을 가하고 법망을 피해 행해지는 나체 연극에는 말이 없다. 극장은 입장객의 카메라 단속에만 바쁠 뿐이다. 분묘안에서 미디어의 시선 역시 제한이 없다. 영야 유괴에 민감한 서구 사회에선 부모가 아닌 성인이 아이들의 사진을 찍는 것 조차도 상식차원에서 엄격히 제제한다. ‘아이들’을 향한 시선이 철저히 관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유아’라는 뜻의 ‘베이비’와 섹시한 ‘글래머’가 합성어를 이루어도 웃고 떠든다. 누구 하나 어색해 하지 않는 이 표현은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페도필(pédophil : 소아성애, 소아성애 도착자,)’에 가깝다. 신체의 일부를 ‘꿀’과 합성하고도 당사자는 행복해한다. 행정구역상 ‘도’를 책임지고, 대선에 나가는 인물의 입에서 신체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튀어나오고, 한 사람이 입법기관이라는 국회위원은 ‘몸 팔기를 권하는 사회와 그 문화’의 극단적인 상황을 대학생에게 ‘친절히’설명해주다 덜미가 잡힌다. 올림픽의 매달만큼 리포터의 의상과 몸매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는 한국사회의 관음증은 끝없이 진화한다.
몸 팔기를 권하는 문화
몸을 팔기를 권하고 있다. 미디어 안에서 가상의 세계에서 몸을 팔게 하고, 몸을 팔도록 각본이짜여지며, 또 모두 팔고 있는 몸을 보도록 한다. 욕망의 체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미디어속의 세계에서 배회하게 만든다, 참지 못하고 돌출하여 현실로 튀어나오면 피범벅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사회는 들썩이지만, 그러나 미디어는 아랑곳 하지 않으며 새로운 이미지로 그 피범벅을 덧칠하고 미디어의 드라마는 비슷한 내용을 재미있게 복제하며 우리를 무뎌지게 만드는 AS(애프터 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사회전체가 이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예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는 잔인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분묘를 벗어난 현실에서 생계를 위해 실제로 몸을 파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하고 돌을 던지며 분묘 안에선, 미디어 안에선 합법적인 매춘을 키우고 있다. 도시한복판에 백화점이 들어서자 생계를 잃게 된 집창촌의 여성들이 살기 위해 나서도 사회는 외면한다. 사회는 암암리에 매춘을 권하며 성 매매 종사자들에게는 현실의 돌을 던진다. 이제 사회 전체가 유곽이 되어있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법으로 관리될 유곽을 허용하는 것이 사회전체가 보이지 않는 유곽이 되는 길을 막는 길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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