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본 세상
그림을 그리다 보면,
더 그릴 수가 없는 순간이 을 때가 있다.
폭격되는 가자지구 한편,
벽에 등을 기대어 서 울고 있던 팔레스타인 소년을 그릴 때 그랬다.
가슴이 먹먹했고,
어떤 색도 더 입힐수 없았다.
따뜻한 방에서 그리고 있다는 사실마저 죄를 짓고 있는것 같았다.
이재명,
상대원에서 연설하는 이재명을 그릴 때도 그랬다.
왠지 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삶.
우리 서민들의 삶과
이재명의 참혹한 삶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하던,
'참혹한 삶'이란 대목에서,
이재명은 목울대를 타고 올라온 한 움큼의 울음을 삼켜내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 대목에서,
나도 울었다.
유시민 작가의 말이 생각났다.
"이재명은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음악을 듣다가 감동을 받을 때면,
'삶의 교차점'을 지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작곡가의 음악에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쩌면,
내가 작곡가가 걸었던 길을 지나치고 있는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작곡가가 삶과 나의 삶이 만나고, 교차하며, 나를 건드리고 지나쳐 가는것이다.
바흐의 음악이 그랬다.
바흐가 내게 '감사와 찬양의 음악'이 아니라 '원망'의 음악이었다.
하늘이 너무나 원망스럽던 순간, 바흐를 듣고 있을 때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바흐의 선율은 하늘에 대한 찬미와 감사보다, 너무 원망스러워서 흘리는 눈물같이 느껴졌다.
바흐의 평탄치 않았던 삶을 알고 나서, 내 눈물의 이유를 다시 한번 이해했다.
이재명에게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고,
나를 울게 한 그 '참혹한 삶'이란,
한국을 생각하면 늘 어김없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전통시장 어딘가에,
인도의 보도블록 한편에 작은 쟁반에 손질한 채소를 파시는
등이 활처럼 굽으신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마음을 먹먹하고, 울먹이게 하는 것은
고단한 삶이 눈에 보여서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이재명의 눈물에 건드려지지 않는 사람들이 절반에 가깝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각자, 각자의 삶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삶의 궤적이 만나지 않을 뿐이고,
교차점이 없으니 건드려지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냥 호소하고 싶다.
정치 이념이나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나와는 관계없어 보이더라도 저기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 모두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조금만 나누어서 모두 같이 잘 사는 그런 세상을 좀 만들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인을 지지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참혹한 삶을 이야기 하며 눈물흘리는 사람이 적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슬픔보다, 행복한 순간이 더 많이 교차하는 삶이, 그런 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lBb7kAPlOCo
https://www.youtube.com/watch?v=jWc7q-nf_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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