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본 세상
지독히도 진부했다.
같은 패턴, 같은 캐릭터, 같은 클라이맥스, 같은 배경, 같은 스토리.
늘 똑같은 이야기를 배우와 배경만 바꾸어서 찍어내고 있었다.
볼만한 드라마가 '고갈'된 시대다.
채널은 늘어나고, 수익에 눈먼 돈들이 쏟아지는 통에,
품질 미달의 상품들이 우후죽순으로 유통되는 모습이다.
'명작'은 고사하고 보아줄 만한 드라마가 씨가 말랐다는 사실은, 한 가지 질문으로 확인된다
"빨리 돌리기를 하지 않고 온전히 보고픈 드라마가 있는가?"
과거의 명작들이 너무 빼어났던 탓도 있겠지만,
요즘은 평균이하의 작품들이 너무 많다.
이유 없이 죽이고, 이유 없이 화려하다.
"손맛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돈맛뿐이네."
드라마 '당신의 맛'에서 회장님의 대사였다.
극 중 대사가 아니라, 드라마에 대한 '자평;처럼 들렸다.
진부한 틀에, 스토리는 치밀하지 않았고, 이야기의 개연성도 희박했다.
극초반 유일하게 흥미로운 것은 바로 배우 고민시의 존재였다.
분명 예쁜 배우는 어디에나 있는데, 왜 이토록 예뻐 보일까?
답을 찾는 데는 2회 차가 걸리지 않았다.
모든 장면들이 '예쁘게 찍혔다' 모든 장면을 최대한 예쁘게 보이도록 찍었다.
과거 윤여정 선생의 일갈이 떠올랐다.
"어머 걔네들은 세트도 필요 없겠더라,
그냥 얼굴을 그렇게 클로즈업하는데 무슨 세트, 무슨 의상이 필요하니?"
송혜교와 조인성의 드라마를 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던진 말씀이었다.
농반은 작가와 감독이 미남 미녀 배우를 너무 예쁘게 찍었다는 것이었고,
진만은 그렇게 외모에 집착해 버리면 그만큼 안 예쁜 사람들은 어떡하냐? 였다(나는 그렇게 들렸다.)
감독과 작가가, 어떤 배우에게 꽂히는 경우는 늘 존재한다.
드라마를 책임진 감독과 작가의 권리이기도 하다.
어차피 예술가는 관객을 설득시키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설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와 감독이 스스로 잘못 설득시키면, 다시 말해 잘못된 길로 가면,
드라마는 망한다.
대중이, 시청자가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이라면, '대본의 치밀함'이나 '연출의 완성도'도 시청자를 '현혹시켜야 한다.
당신의 맛에서의 고민시의 모습은, 극도로 아름다운 모습만 최대한 뿌려대고 있다.
마치 극강의 진부함을 여배우의 미모 하나로 헤쳐나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조연배우마저도, 예쁘고 귀여운 외모를 살린 장면을 기가 막히게 잡아낸다.
사실 인류역사상 지금처럼 미학이 대세인적은 없었다.
특히나 이미지의 시대에 k문화에서 보이는 미소년, 미소녀 패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역사가 쌓여, 이제는 미학적 노하우가 더 오를 곳 없는 천정에 닿은 느낌이다.
어떻게 그렇게 남자 배우들의 입꼬리는 이쁘게로 45도로 올라가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여배우들의 치열과 피부는 조선백자 같은지... 너무나 인공적이었다.
이미지로 소비된 배우가 그 편안함 속에 장생할 수 있을까?
나문희 선생, 윤여정 선생의 아름다운 주름처럼,
세월과 경륜이 배어있는 깊이 있는 아름다운 주름을,
우리는 고민시에게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고민시의 미모로 밀어붙인 드라마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약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5회 이후론, 고민시의 백옥 같은 피부도 빛을 잃기 시작했고,
대사가 많아지며 특유의 '긴장'도 사라졌다.
모래시계시절의 이정재가 '대사 없이' '죽도' 하나로 연기력을 유지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후 이정재는 '발성'을 연습했다.
그리고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대사와 함께,
한국영화사에 손꼽히는 최고의 '악역 등장신'을 선보이며
과거의 연기논란시절의 이정재를 영화'신세계'처럼 묻어 벼렸다.
배우는 어떤 외모여도,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예쁘고 잘생겨도 충분히 망할 수 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무리 좋은 배우라도 '의미 없는 대본'은 살릴 수 없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옛날엔 손맛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돈맛만 남은, '
빨리 감기 없인 볼 수 없는 드라마의 후반부는,
'당신의 맛'이 아닌, '안타까운 맛'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