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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의 질문들에서만이라도,
제발 자막은 빼자...

파리에서 본 세상 - 예능 망국론 03

유독 수동적인 시대.

모든 것을 떠먹여 주는 시대에서 인간의 근육은 점점 퇴화한다.

팔과 다리는 오래 살려고 뜀뛰기라도 하기에 건재하다지만,

정작 슬프게 퇴화하는 것은 '생각하는 근육'과 '느끼는 근육'이 아닐까?


폭풍의 언덕을 책으로 읽은 사람 보다, 아름다운 쥴리엣 비노쉬의 영화로 본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첫 문장이 멋진 위대한 겟츠비도, 활자가 아닌, 매혹적인 디카프리오의 영화로 만난 독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책 보다 영화로 명작을 만나는 경우가 더 많을 이유는 간명하다. 보기가 쉽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수고'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사이, 영화 매트릭스와 인셉션의 슬픈 예언처럼, 우리는 모두 눈과 귀에 전선을 연결하고 영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렇게 시청자를 바보로 만드는 바보상자, 텔레비전. 그리고 더 강렬한 '유튜브'가 일상인 세상. 그렇게 넘쳐나는 콘텐츠들 속에서 그나마 지적 프로그램을 찾아, 멋진 사회자의 유려한 질문과 늘 응원하던 멋진 배우를 고대하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손석희의 '질문들'을 시청했다. 그러나,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여기서도 시청자를 바보로 만들고 있었다.


뉴스에도 예능에도 자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젠 너무 과하게 느껴진다. 손석희 질문들도 '예능' 같았다. 차라리 라디오 시대가 그리웠다. 대화를 듣고 질문들을 듣고 그 사이의 여운에 답을 상상하며 그 내용에 젖어드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변자의 반응이 자막으로 '적시'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거나, 방해한다. 결국은 모두 방청석의 관객과 함께 다 같이, 자동차 안에서 머리가 흔들이는 강아지처럼 다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모습이 공포스러웠다.


나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자막들과 뻔한 질문과 형식들이, 너무 단순했다. "여배우는 하나의 우주예요"라고 이야기했던 배우 문성근의 말처럼. '총천연색'의 삶을 두고,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무지개만 그려대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입시위주의 교육에선, 한용운의 시조차, '밑줄 좌악', '별꼬리 떙야'라는 '구호'와 함께 '시'를 두고 '정답'을 외우게 했다. 그렇게 80만 명의 수험생들이, 다른 무엇도 아닌, '시'를 두고도 같은 답을 외우고, 가장 많이 잘 외운 아이들이 서울에서 제일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그 아이들이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고급공무원이 되어서 지금의 이 사회를 이 꼴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방송국의 PD들도, 그런 '상상력 없애는' 공부를 잘했던 아이들 아니었을까?


철학자 아감벤은, 현대에 예술의 위기라면 그것은 '시(詩, poetry)'의 위기라고 말했다.

'시(詩, poetry)의 위기란',

알 수 없는, 답을 모르는 길이 아닌, '답을 뻔히 아는 길'로 흘러가는 예술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철학자 아감벤의 슬픈 예견처럼,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의 대화 속에서 피어날 무수히 많은 울림을,

'재미'를 위해 단 몇 줄로 '정리'해 버리는 저 무지한 형식은,

우리를 쉽고 편한 놀이 안에 가두고, 세상의 진실을 편하게 외면케 만드는,

슬픈 우리 시대의 단면처럼 느껴졌다.



*질문들...

손석희 질문들 캡쳐 1.JPG
손석희 질문들 캡쳐 2.JPG
손석희 질문들 캡쳐 3.JPG
손석희 질문들 캡쳐 4.JPG
손석희 질문들 캡쳐 5.JPG

대중을 바보로 대하면,

대중은 바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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