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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소년이 온다 01
-한강작가의 글을 만나다.

위대한 이상을 그리는 시지프. 프로젝트 소년이 온다

나는 필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 생각 없이 글을 배껴적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시간이 무작정 흘러서, 게으른 삶처럼 되어버리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죄책감을 무릅쓰고도 언제나 무언가 적어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난해한 미술 비평이나 철학과 관련된 글들을,

수없이도 베껴 적었다.

적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도 그렇게 적어라도 보면, 그 글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갔으면.. 하는 희망과 함께 적었다.


한강의 책을 펼쳤을 때,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돌멩이 같았다.

글자 하나하나를 고르고 다듬어 활자판에 놓고 찍어낸 느낌이었다.

작가가 삶과 시간을 '갈아 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의 그 느릿느릿하고 조용한 말투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을 작가의 모습이 상상됐다.


채식주의자는 비교적 가볍게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가볍게 읽어내려갈수 없었다.

눈으로 읽는 것보다는 느리게, 작가의 속도보다는 분명 빠르게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침묵, 정적이 좋았다.

정보취득과 사회적 책무로 인해 규칙적으로 뉴스를 접하며

매일을 몇시간씩, 온갖 험한 말들과 허망한 이야기들을 귀에 집어넣다가,

모든 소리를 멈추고, 스각스각 만년필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소년이 온다의 이야기를 한문장, 한문장씩 적어내려 갔다.


빨간색에서 시작해서 파란색으로,

마치 적과 청, 두 개의 상반된 원색, 좌와 우, 마치 정치의 양쪽처럼,

좌심과 우심, 마치 심장의 왼쪽과 오른쪽처럼, 두 가지 색깔을 번갈어 넣어가며 적어내려 갔다.

차분히 그냥 소설의 내용만 받아 적기엔, 무언가 아쉬웠다.

작가의 숨결을 그려낼 수야 없겠으나, 작가가 적어놓은 단어들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네 삶처럼 미세하게 변화하며 살아있게 해주고 싶었다.


빨간색에서 시작해서 파란색 잉크로 바꾸면, 색이 조금씩 보라색을 커쳐 파란색으로 바뀌어 간다.

그 미세한 변화가 좋았다.

참담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두고 그렇게 시각적 취미를 즐기고 있느냐고 나무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소설 속의 인물들이 흘렸을 피도,

이렇게 미세하게 변해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상상을 거둘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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