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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언과 한강,
감각적 불복종 그리고 박구용

프로젝트, 소년이 온다 (07)

프로젝트, 소년이 온다 (06)


'예술의 종언, 예술의 미래'라는 책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대목을 읽은 것이 1999년의 일이었다. 당시, '낯설게 하기'는 브레히트 연극에서 이미 등장했던 용어였다. 너무 단순한 해법같이 보여서 마음이 가지 않았다. 수많은 환상적인 '이미지'에 익숙해진 대중에게 예술가들은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라? 저명한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결론이었지만, 동의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한강의 글을 읽으며, 한강의 글에 대한 철학자 박구용교수의 분석을 들으며, '아.. '낯설게 하기'가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독자를 관객을 대중을 '깨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 들었다 얼마 전 필사한 문장 한 대목이다.


'설탕같이 부스러지는 수박을 먹었지.'


설탕같이 부스러지는 수박은, 우리가 종종 너무 익은 수박을 먹을 때 만나는 부분이다. 입자가 단단한 다른 부분과는 달리, 팥빙수 속 얼음처럼 부스러지는 부분. 그 부분을 먹을 때면, 난 늘 뭔가 께름칙했다. 너무 익어서 식감이 없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설탕같이' 부스러진다고 적어 놓았다. 설탕에 물이 스며들 때, 모래성이 바닷물에 무너지듯 부스러지는 그 모습이 연상됐다. 부스러지는 수박을 먹는 장면을 회상하는 주인공의 기억을 이야기하며, 설탕같이 부스러진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한강의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의 단편들 장면의 조각들의 서랍에서 이 표현을 꺼내어 써놓은 것이다. 이 문장은 나를 어느 어린 시전 한 더운 여름으로 데려갔다.


글을 읽고 한 문장 음미하고 또 음미했던 것은 '토지'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통영 앞바다를 묘사하며, 작은 통통배가 지나가는 장면을 적어놓은 대목에서 '자기도 배라고 여울이 인다.'라는 부분이 있었다. 그 짧은 대목은 너무 앙징맞았다. 작은 통통배가 자기도 배라고 여울을 남기고 지난다고 쓰다니.. 작가가 통영 바다를 바라에 대한 사랑이 담긴 문장이었다. 작은 배가, '자기도 배라고' 명명되는 순간, 아장아장 걷는 작은 아이처럼 '생명'이 되었다. '자기도 배라고 여울이 인다.'... 내 마음에 여울을 남겼다.


박구용이 분석했던 것처럼 한강의 글은 감각을 일깨운다. 글로 적은 것은 우리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관찰력도 놀랍지만, 자신이 관찰해 두었던 것을 담아두었다가 작품 속에 풀어놓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관찰한 장면들이 모두 우리가 한 번쯤은 보았던 장면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어렴풋이 보았던 장면을 더 '적확하게'집어내서 보여준다는 것이 놀랍다. 어제 읽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촛불을 든 주인공이 일어나자 그림자가 높다랗게 커졌다는 대목도 그러했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거쳐간 무심코 지나친 공통의 기억들을 작가는 꺼내고 우리의 감각을 함께 일깨운다.


하여,

내가 얻은 힌트는 '낯설게 하기'를 하는 방식은 다른 어떤 충격이나 뒤틀기와 같은 '반동'을 전제로 한 추동이 아니라, '강각을 일께 우는 것이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예술의 종언 예술의 미래'는 20세기말에 예술의 죽음에서 가다머가 주장한 '낯설게 하기'는 고루해 보였다. 그러나, 한강의 글을 통해 소름이 돋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결국 관객을 일깨우는 것은 관객의, 독자의, 청자의, 무감각해져 가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라는 너무 단순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박구용은 이를 두고, '감각적 불복종'이라는 표현을 쓴다, 탁월했다. 한강의 문학을 두고, 권력에 저항한 감각적 불복종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은 그녀의 작품이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오늘, 11월 16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전을 촉발한 공습이 아닌, 겨울 난방을 해결하는 가스관에 대한 공습이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겨울을 앞에 두고, 다가올 혹한에 벌써부터 공포에 떨고 있다고 뉴스는 전하고 있었다.


미디어에 익숙해진 우리 세대는, 내가 춥기 전에는 모니터에 등장하고, 뉴스에 보도되는 사람들의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영화 친구의 대사가 '유행'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절망했었다. 심지어 코미디 프로에서 '많이 묵었다 아이가'라고 말하며 낄낄거리는 개그맨들과 청중들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폭력'에 대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 너무 '만연'해 있었다. 여전히 부산거리에선 조폭들이 난투를 벌인다는 뉴스를 보았다. 폭력이 '무감각'한 사회의 다음 수순은 '폭력의 일상화'다.


images.jpg 고통 속에 죽어간 현장을 '구경'하는 이가 전 대통령이었고, 현시장이다. 더구나 이 사진을 '홍보용'으로 쓰려했다.
images (1).jpg 국민의 죽음을, 홍보용으로 쓰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감각한 시대, 영화 인셉션처럼 코드를 꽂고 잠이 드는 시대에, 한강의 글이 가진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가장 나약해서 소리 없이 바스러져 사라지는 존재들에 대한 '애착' 그런 사랑은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죽은 자들이 산자를 살리는 기적'을 우리는 지난 내란의 밤에 보지 않았던가.


내 집값을 지키기 위해,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생명에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뽑는 것, 그것은 내 재산과 집값은 지켜줄지 모르지만, 우리가 서있는 세상을 생명이 없는 세계로 만든다. 경기도에서 죽어간 세 모녀와 신림동 반지하에서 죽어간 세 모녀, 내 가족이 내 지인이 아니기에 뉴스 한 줄로 지나가 버리는 그 존재들에 대한 '무감각'을 깨워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예술일 텐데, 그런 예술이 너무나 보기 힘든 요즘,

그래서 한강의 작업이 더욱 빛나고,

박구용 선생의 분석에 감사한다.

모든 고통받는 생명을 위하여...



ps

한강버스가 또다시 멈춰섰다.

끊임없이 시민의 '생명'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위험에 몰아넣는 사람...

어떻게 이런 사람을 시장으로 뽑을 수 있었나...

우린, 어디까지, 언제까지 무감각하게 이 무도한 이들을 봐주어야 하는가...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229436.html


20251116_120454.jpg 한강, 소년이 온다. 59 페이지




https://www.youtube.com/watch?v=qik4yO1QVqM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63165.html



https://www.youtube.com/watch?v=Gd1k6tr_c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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