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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그리고 다른 음악가

세상의 모든 아침 열여섯 번째 이야기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죽어 하늘나라에 갔을 때 무슨 말을 듣고 싶은가?"


프랑스의 전설적인 문학 토론 프로그램이었던 , 

'아포스트로프(Apostrophes)',  '부이용 드 퀼튀르(Bouillon de culture)'를 진행했던 베르나르 피보의 질문이다.

늘 초대손님들에게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이 질문을 던졌었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 "Bon Vacances 휴가 잘보네게"라고 답했고

영화배우 브리짓 바르도는 "je t'aime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늘 이 장면을 보다가 어느 날 문득, 나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면,

무슨 말을 듣고 싶을까?

내 답은 


"Mozart t'attent! 모차르트가 기다리고 있네!"였다.


모차르트.

나는 베토벤의 합창으로 클래식에 입문했다.

합창을 한참 듣고 있을 때 음악에 조에가 깊었던 친구가 말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어보라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내 안에서 합창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빼앗았다.

베토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모차르트가 우선이 되었다.

쇼팽도 차이코프스키도 바흐도 바그너도 모두 모두 모차르트와 다른 차원에 놓였다.

나 혼자 내린 결정이었다. '모차르트와 그 이외의 음악가들'이라고 말이다.


2018년, 올해 타계한 밀로스 포만의 아마데우스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재로 그려졌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 대문에, 나도 모르게 모차르트를 최고로 인식하게 되었는지도..

그러나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모차르트와 다른 음악가들을 자꾸 구분 짓고 있었다.

등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1등 2등 3등이 아닌, 모차르트와 

다른 음악가 작곡들이라고 아예 나누어버린 것이다.


논쟁이 붙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 선배와는 베토벤을 두고 다투었고, 

그 이후론 나의 이런 생각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몰래 나 혼자 검증해 보기 시작했다. 왜일까?

왜 나는 모차르트를 특별하게 생각하는가?


길지 않은 시간을 거쳐 내가 찾아낸 답은 다음과 같다.

음악을 듣다 보면, 작곡가들의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작곡가들의 특성을 통해 그 음악가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고전주의 낭만주의와 같은 음악사의 장르로 구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별칭이 붙기도 한다. '음악의 아버지' 하면 바흐이고, 헨델을 가리켜 '음악의 어머니'라고도 한다.

작곡가의 색깔에 따라 나누어질 수도 있다. 

피아노의 낭만 시인하면 '쇼팽'이다. 가슴을 저리는 애절한 사랑 하면 떠오르는 작곡가가 쇼팽인 것이다.

애절한 사랑을 넘어 진한 슬픔의 무게를 이야기하자면 우린 '슈베르트'를 떠올릴 수 있다.

슬픔의 연장선에서 대 자연의 러시아 대 평원의 광활함과 슬라브적인 우수를 떠올리면 

자연히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와 만나게 된다.

낭만적인 웅장함을 이야기하면, 물론 '바그너'다.

진지한, 인간적인, 때론 실패의 맛을 아는 인간적인 면을 떠올리면, '브람스'가 있다.

베토벤을 생각하면, 하나의 건축이 있고

바흐를 생각하면 신에 대한 경배와 수학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렇게, 이 외에 수많은 작곡가들은 그들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각자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에게 이 모든 특색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을 듣다 보면, 수많은 다른 작곡가들의 특징들이 그만큼 녹아있다.

뒤늦게 프랑스에서 유행을 탄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예로 들어보자.

우린 그저  엘비라 마디간에 삽입된 피아노 협주곡 번 정도의 우아한 선율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 가진 애수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모차르트의 애수의 세게의 입구만 본 것이다.

23번의 2악장은 쇼팽의 낭만과 실연의 비수를 품은 상처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


슈베르트와 같은 죽음의 그림자?

레퀴엠에 이미 보였던 것이 이미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비통이라면

같은 해에 작곡된 클라리넷 협주곡은, 마치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처럼,

황혼의 들녘에서 죽음으로 떠나기 전에 세상을 돌아보며 보내는 마지막 미소와 같은 우아한 슬픔이 있다.


베토벤의 황제는 도입부에서 피아노와 관현악이 함께 등장한다. 

라흐마니노프 시대에야 비로소 협주곡에서 주제부를 플루트가 담당하지만, 

모차르트는 이미 어린 시절의 협주곡 7번에서 도입부에 피아노를 등장시켰었다.


버흐나 헨델과 같은 신앙이라면,  Mozart veni sancte spiritus k 47을 들어봐야 한다. 

무려 12살에 작곡했다.

어린 시절, 순수하게 하늘을 향했을 순수한 신앙심을 연상시킨다.



626곡의 모차르트의 음악들은, 하나하나가 사조(思潮)와 색조(色調)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의 말이 생각났다.


"Il était la music. (그는 음악이었다.)"


그래서 난 모차르트와 그 외의 음악가들이라고 나누게 된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첨언한다면,

모차르트의 작품들 중 유사하거나 하나의 협주곡 안에서 반복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사한 작품들의 경우 다른 작곡가들이 초기 작품들이 완숙기의 작품을 위한 습작 형태로

존재하는 사레들에 비추어 모차르트의 경우, 습작으로 존재하면서도 그 시절의 완성미를 갖추고 있다.

한 협주곡 내에서 관악과 피아노 같은 주제가 같은 소절을 반복하는 것은 , 

어린 모차르트가 심심해서 음표들과 놀이를 한 것 같다.

마치 소울에서 가수와 연주자가 음을 주고받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제 마감해야겠다.

나의 캐나다 친구, 실패한 피아니스트인 미콜라는 

유럽에 정착하기 위해 캐나다를 떠나며, 수많은 CD 중에 골라온 한 장의 음악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었다고 한다.

카라얀은 천국에 한 사람의 작곡가를 데려가면 누구냐고 물었더니,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 슈트라우스,,,"라고 말했다.

내가 만약 천당 혹은 지옥에 한곡만을 가져간다면,

바로 이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6KUDs8KJc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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