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06 컨스트럭션과,디컨스트럭션&디스트럭션+피처링;기레기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 컨스트럭션, 디컨스트럭션 그리고 디스트럭션 ( +피처링; 기레기)



* 컨스트럭션     Construction         1. 건설 2. 공사 3. 건축 4. 건립           

**디컨스트럭션 Deconstruction    1. 탈구축   2. 해체 비평 / 1. 해체   2. 해체, 분해   3. 해체, 파괴

***디스트럭션  Destruction         1. 파괴 2. 파멸 3. 멸망 4. 파기




“나는 이 金敬姬라는 이름의 여기자분이 이러한 나의 코멘트를 써놓은 것이 완전한 픽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사란 재미있게 써야 하고 남의 말을 그 내면까지 다 싣기엔 너무 원고의 양과 집필 시간이 부족하며 또 황병기 선생과 내가 마치 백남준 – 김현자 공연에 대하여 –미친 짓 –천재 짓이라는 테제와 안티테제를 제시한 것처럼 써놓아야 또 기사거리로서 재미있게 돋보일 것이다. 기자들 손가락 밑에선 누구든지 이 재미라는 바위 덩어리 롤라에 깔려 압사하게 마련인 것이다. 나는 사실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고 괴짜라는 패괴한 간판도 걸대로 걸었으니깐. 그러나 아마도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예술계의 인사 한 분의 말씀을 내 말 써놓은 것처럼 써 놓았다면 또 벼라별 뒷 소문과 쌈박질이 벌여졌을 것이다. 남의 말을 드라마틱하게 압축시켜도 그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는 진정한 내용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이 역시 우리 기자님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대학밖에 나오지 않았고 아직 공부도 덜된 어린 사람들이 시험지 한 장으로 하루아침에 기자기 되고 또 기자가 되었기에 하루아침에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좀 터무니없는 자신의 처지를 항상 반성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학자는 그래도 대학 졸업 후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글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스무 해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좀 상기해주기 바란다. 난 이 기사에 관해 백 선생님께는 아무래도 좋았으나 사실 김현자 선생께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기에 나중에 송구스럽게 되었다는 사죄를 들야만 했다. “ (김용옥 저, 석도화론 중 212 페이지, 강조는 옮긴이)  



상황은 이러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무용가 김현자 선생이 함께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인데, 백남준 선생의 죽마고우이셨던 황병기 선생은 ‘너무 좋았다.’ 하셨고, 철학자 김용옥 선생은 공연이 어떠셨냐고 묻는 여기자에게 “백 씨의 경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미친 짓”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김용옥 선생은 질문은 했던 여기자가 대학생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학생이 궁금해서 여쭙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설명을 해주신 것이다. 그런데 어린 대학생으로 보였다는 그 여기자분은 김용옥 선생의 설명은 '쏙' 빼버리고 ‘미친 짓’이라는 단어를 황병기 선생의 '천재적'이라는 평가와 '대비되도록' 뽑아버린 것이다. 


기자들이 하는 말장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 역시도 기사를 쓰며 어떻게 하면 더 멋진 제목과 드라마틱한 구성을 할 수 있을까 수도 없이 고민한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할 대목은 그런 재미나 클라이맥스의 차원이 아니다. 김용옥 선생께서 전제하신 ‘백 씨의 경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와 그에 이어지는 그의 설명은 우리가 줄기차게 이 매거진의 간판으로 달고 있는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에 ‘예술’과 ‘에술작품’에 대한 ‘적절한 판단’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김용옥 선생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나는 한마디로 모든 예술적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영원한 예술성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할 지라도 반드시 그것이 소산 되게 된 주체. 즉 그 인간이 속해있는 시대적 환경의 제약성이나 그 상대적 가치의 특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김용옥 선생이 강조하신 '시대적 환경의 제약성'과 '상대적 가치의 특징'은 앞서 전제한 '백남준 선생'의 경력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경력이란, '세계적인 예술가'라거나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와 같은 '간판 성' 경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김용옥 선생이 지적하신 '백 씨의 경력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미친 짓일 뿐'이라는 문장 안에서의 '백 씨의 경력'이란, 김용옥 선생이 직접 백남준에 대해 묘사한 표현을 빌자면, "각고의 훈련의 과정, 그리고 자유를 가능케하는 온갖 구속의 체험"이다.


당시 1992년 퍼포먼스에서 늘 그렇듯 헐렁헐렁한 멜빵바지를 입고 등장한 백남준 선생은 진지한 김현자 선생의 춤사위를 뒤로하고 피아노에 못을 박는가 하면, 카메라고 이빨을 비추는 등 소위 '기괴한 동작'의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다. 김용옥 선생은 이를 두고서, 백남준 선생의 기나긴 창작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미친 짓'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설명하신 것이다. 


실제로 그날의 공연은 두 퍼포먼서(백남준과 김현자) 간에 어떠한 사전 조율이나, 연습, 소위 리허설도 없이 진행되었다. 김현자 선생의 진지한 춤사위에 관객의 집중도가 점점 증폭될 즈음 백남준 선생이 등장하여 '엉뚱하고', '성의 없어' 보이는 '동작'으로 무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긴장감을 무너뜨려 버린다. 다시 말해서, 공연을 보러, 공연을 즐기러 참석한 관객들이 역설적으로 '예술'이라는 '상황'에 구속되어버린 상태를 깨버리는 것이다. '생각 없이 이루어진 행위'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의도된 '행동'이며, '평생'을 걸쳐 '고민해온 문제'에 대한 '반향'이었던 것이다. 당시 공연을 지켜본 연출가 손진책은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백남준 예술이라는 게 우리가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통념, 무대 위의 배우는 뭔가 잘 꾸며 보여야 하고 또 무대 밑의 관객은 방관자로서 그걸 잘 쳐다봐야 하고 하는 그런 통념을 깨버린다는 역사적 맥락, 우리 예술인들이 예술로써 해탈했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술이라는 행위에 가장 구속되어 있는 존재라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고 또 코믹하게 만들고 하는 맥락 속에서 역시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바보스럽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고 또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바로 그러한 해방의 일면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금물이다." (김용옥, 석도화론 219페이지, 통나무, 김현자 백남준 퍼포먼스에 대한 손진책의 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남준이 행한 '해괴한 행위예술'이 아닌, 그러한 '해괴한 행동'이 '예술행위'로서 평가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다시 말해서 백남중의 예술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그의 역사이다. 이 문제에 대해 김용옥 선생은 더 간명하게 설명한다. 소위 대학생이 피아노를 부수면 혼나는데 왜 백남준이 피아노를 부수면 칭송받느냐? 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물론 여기서 답은 명료하다. 대학생의 디컨스트럭션은 컨스트럭션의 기나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시적 디스트럭션의 이미테이션(a shoddy imitation of destruction)이요, 백남준의 디컨스트럭션은 지루하리만큼 기나긴 컨스트럭션의 고심의 반어일 뿐이다." (김용옥, 석도화론, 218 페이지, 통나무)


그렇다면, 왜? 어째서, '디컨스트럭션'은 '컨스트럭션'을 '전제'로 해야 하는가? 그것은 '건설' 즉 '컨스트럭션'이 부재한 '디컨스트럭션(탈구성, 해체)'이란 '의미'없는 '단순한 해체'즉, '파괴'일뿐이다. '컨스트럭션(건설)'이라는 숙고의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탈구성 행위'는 '탈구성'이 아닌 단순한 '파괴'또는 '해체'일뿐이며, 그러한 '파괴'는 폭력을 동반한다. 많은 '탈구성'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많은 창작행위들이 '공해'로 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의미 없는 공해'이거나,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주는 '파괴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글을 김경희 기자에 대한 비판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기자가 단순히 '재미'를 강조하기 위해 '가볍게' 누락시킨 김용옥 선생의 분석에는 '가볍지 않은' 작가의 생애가 담겨있으며, 수많은 오해와 비판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일구고 있는 많은 젊은 작가들의 갈길이 제시되어있다. 기자의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지금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기레기들의 물결을 보며, 이들이야말로 '탈구성'이 아닌 '파괴'의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숙고'라고는 없는, '성숙'은 기대할 수 없는,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실'을 외면한 채 마음대로 '짜깁기'를 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자'에 대한 고려라고는 전혀 없는... 


알베르 카뮈가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예술을 모든 것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라고 했듯이. 백남준에게 '삶의 모토'는 '예술'도 '창조'도 아닌 '비폭력'이었다. 그의 단순해 보이는 또 때론 기괴해 보이는 행위는 기나긴 고심의 반향이기에 파괴가 아니며 김용옥 선생의 말씀처럼 '완성의 완성'`이었다.


"파괴는 완성의 파괴가 아니라 완성의 완성이다. 다시 말해서 파괴는 끊임없이 새로운 완성을 지향해가는 계기로서만 그 심미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백남준은 분명 그런 혐오의 대상이 거나 폭력적 파괴 주의자가 아니다. 백남준의 일생을 지배한 삶의 모토는 비폭력(Non-Violence)이었다." (김용옥, 석도화론, 218페이지, 통나무)

매거진의 이전글 05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사는 예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