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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컨스트럭션&디컨스트럭션2,딱딱한 학문&부드러운 학문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풍요로운 창작의 세계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딱딱한 학문과 부드러운 학문 그리고 예술  



내가 만났던 학자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미셸 세르(Michel Serres)라고 말할 것이다. 따뜻한 할아버지 같았다. 첫 만남에서 한국사람이라고 말하자 스탠퍼드에 한국 제자들이 많다며 반가워하셨고, 몇 해가 지난 후에 다시 책 토론회장에서 만났을 때도 또렷이 기억하고 반겨주셨었다.  노년에도 그의 눈은 정말 반짝반짝 빛났다. 그 어느 별보다도 밝았다. Hominescence라는 그의 저서 출판 기념 토론회가 열렸던 서점 프낙(FNAC)에서 처음 그를 보았을 때, 토론회중 "언제 이 책을 구상했는가?"는 사회자의 질문에 "1960년대 "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가 2001년이었으니, 40여 년 만에 책이 나온 것이다. 헤르메스라는 연작을 발표한 과학철학자, 20세기의 마지막 천제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의 세미나와 방송 토론을 정말 재미있었다. 시골에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 같았다.


 그가 대중 컨퍼런스에서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 중 내게 가장 기억에 남고, 또 나중에 논문에도 인용했던 대목은 바로 ‘딱딱한 과학’과 ‘부드러운 과학’ 달리 표현하면 ‘딱딱한 학문’과 ‘부드러운 학문’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딱딱한 학문'이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학문'이다. “ 


당시 미셀 세르가 말한 어휘는  'Science dure'와 'Science douce'였다.  여기서 'science'는 '과학' 또는 '학문'이라는 단어이다. 'Dur(여성형 Dure)'는 '딱딱한' 이란 형용사이고, 'doux(여성형 douce)는 '부드럽다'는 형용사다. 이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딱딱한 학문의 대표적인 것은 ‘물리학(Physique)이다. 그래서 이 물리학으로부터 부드러운 학문인 '형이상학( metaphysique)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인문사회학(Science Humaine)은 애초부터 부드러운 학문이다.” 


나는 여기까지만 기억하고 나머지 강연 내용은 잊어버렸다. 늘 듣고 싶은 말을 듣고, 나머지는 잊어버리고 마는 못된 버릇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위에 언급한 단 몇 마디, 즉 "인문사회과학은 부드러운 학문이다."라는 말이 너무 흥미로왔기 때문이다.


'컨스트럭션'과 '디컨스트럭션'을 이야기할 때, '디컨스트럭션', 즉, ‘재구성’ 내지는 ‘탈구성’의 단계에 이르려면 전재되어야 하는 것은 ‘구성’ 즉 '컨스트럭션'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무엇을 부수던 다시 만들던, 쉽게 말해 부딪혀서 ‘소리’, ‘반향’이 나게 만들려면, 무엇인가 ‘딱딱한’ 결과물, 또는 ‘딱딱한’ 소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우리가 ‘트집’을 잡으려면 ‘껀수’가 있어야 하듯이, 무엇이던 ‘어떤 반향’을 일으키려면, 그 반향이 ‘부딪힐’ 대상이 있어야 하거나, 어떤 ‘소리’가 나려면 '소리' 부딪혀 울릴 ‘기반’이 있어야 한다. 소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딛고 일어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경우 딱딱한 ‘물리학’이라는 기반, 돌덩이에 부딪히며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틀려도 상관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문과학’은 ‘딱딱한 학문이 아니라 태생이 ‘부드러운 학문’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부딪혀서 소리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프랑스 말에서 해괴한 괴변이나 말만 늘어놓는 경우를 ‘BlaBla(불라불라) 한다.'고 말한다. '공허한 장광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팔 불듯이 헛소리만 지껄인다는 뜻이기도 한데, 학문의 경우 정확한 ‘맥’을 집지 못하고, 다시 말해서 ‘핵심’은 짚어내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문과학’ 이 부드러운 학문이라는 이야기가 내 귀에 꽂힌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당시 대학에서 내가 겪었던 그 수많은 '구름 잡는 이야기'들, 인문학을 공부하는 한국 선배들에게서 들으면 그나마 이해가 되었지만, 내가 겪은 현대 미술계에서 논의되던 담론들은 당취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과학 체계 안의 용어들과도 통일되어있지도 않았다. 서로 다른 말들을 늘어놓는 물렁물렁한 대화들의 뒤범벅이었던 것이다. '예술은 사기'라고 말씀하신 백남준 선생의 말씀이 또 삐쭉 고개를 쳐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 분야,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그 어려운 이야기들 속에 귀를 솔깃하게 하는 몇몇 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사상 전체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이해가 가는, 흥미롭게도 수긍이 가는 대목들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또렷하게 각인된 학자들과 이론들은 모두 명쾌했다. 그들이 왜 모두 명쾌할까? 어째서 그렇게 또렷하게 ‘족적’을 남기면서, 인문사회학의 전공자가 아닌 나 같은 대중에게까지 알려졌을까? 예를 들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아우라’의 발터 벤야민, 그리고 ‘감시와 처벌’로 유명한 미셀 푸코, ‘감각의 논리’로 유명한 자크 랑시에, ‘구별 짓기’, ‘아비투스’의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첫 글에서 인용한 바 있는 ‘호모 사케르’의 대부 조르죠 아감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 다시 미셀 세르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자면, ‘부드러운 학문, 부드러운 과학’인 ‘인문사회학임에도 불구하고, 딱딱한 출발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모두들 ‘역사적 사실’, ‘실증적인 리서치’에서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다. 


'감시와 처벌'을 쓴 미셀 푸코는 18세기의 원형 감옥 파놉티콘을 관찰했다. 이 이론은 지금의 감시사회의 본질까지 꿰뚫고 있다. '무지한 스승'의 자크 랑시에는 1818년 루뱅 대학의 외국인 교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구별 짓기'의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학적 리서치에서 출발했다. 처음에 언급한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보들레르가 살던 파리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한 것이 다름 아닌 아감벤이다. 아감벤은 벤야민의 사료만 뒤진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리서치하고' 호모 사케르'를 발굴해 낸다.


다시 말해서, 부드러운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에서 또렷한 딱딱한 실증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물리학'이 '딱딱한 학문'으로 '형이상학'을 출발시켰다면(준동시켰다면), 이미 '부드러운 학문'인 '인문사회학'을 다시 '출발'시킬 수 있는 딱딱한 학문은 ‘고고학’과 같은 실증적인 ‘리서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이야기이고,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것 역시도 모르겠지만. 내친김에 한걸음 더 나아가, 같은 인문사회과학으로 부드러움의 극치를 달려 가스상태에 까지 이른 예술, 그것도 현대 예술에 있어서 딱딱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을 무엇일까?라고 질문해 보았다. 그런 것이 있을까? 미학자 티에리 드 뒤브가 '예술의 이름으로(Au nom de l'art)'라는 책에서 '예술'의 개념의 역사에 대해 소상히 시대를 타고 올라가는 시도를 한적은 있었다. 심지어 그의 책은 '미셀 푸코'에게 '헌정'되어있으며 부제도 '모더니티의 고고학을 위하여'이다. 출발점이 나와 같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티에리 드 뒤브는 '예술'에 대한 개념을 역사적으로 모두 살펴보는데, 마치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실재 '감옥의 형태'들을 정리하듯이 말이다. 그러데 흥미로운 것은 푸코는 실재 감옥들을 연구하며 그 시스템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데 반해, 티에리 드 뒤브는 '예술'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따라가다가 '예술의 개념'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티에리 드 뒤브의 실패를 보며 내가 찾은 것은 다름 아닌 , 미술사도 아니요(역사는 이미 기술한 사람의 시각이 반영되어있으니 객관적이라 할 수도 없었다.) 바로 작가 개인의 삶이라는 ‘알갱이’였다. ‘작가’가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부딪히며 내는 소리들, 또는 작가가 내면으로 겪은 소리들을 담아낼 때, 소위 ‘불라불라’가 아닌, 허황된 현학적인 헛소리가 아닌, 들어볼 만한 ‘소리’가 되는 것 아닌가? 란 결론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가 건립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요, 또 탈구성과 해체를 해야 한다면 다시 작가가 건립한 경험과 '삶'이라는 덩어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에 한국에 세 번째 온 사람입니다. 많은 한국 작가들을 만나고 싶었으며, 또 미국에 있는 한국 작가도 만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 아래 나는 그 질문에 답하고 싶습니다.

내가 한국 작가를 만난 경험에 의하면 그들은 국제적 진출이라는 것을 상당히 염두에 두면서 서구의 미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더니즘에 대하여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데에 놀랍기도 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그 말이 서구에서 생겼듯이 서구 문화 형태 속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포스트 모더니즘은 한국적 생활양식 속에는 맞지도 않고 적용되기도 힘들다고 생각됩니다마는 왜 한국 작가가가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느끼기에 한국 작가들은 호기심이 많은데 비하여 자신감이 적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작가들은 서구로부터 무엇을 배우려고 한 하고 서구인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제시하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중략)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로 명성을 얻은 것에는 단지 테크놀로지의 완벽한 응용이라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적 샤머니즘의 적극적 개입이 있었던 점도 중요합니다. 국제무대에로의 진출이란 남을 배우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고유성이 있어야 구현됩니다. 그래야 서구인이 말하는 멀티 컬처 속으로 당당히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한국 작가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또 한국에 올 것입니다.”   (엘레노어 하트니가 남긴 충언, 정직한 관객, 유홍준 53-54페이지, “가나아트” ‘단상’ 1992년 9-10호) 



유홍준 선생이 인용하 신미국의 평론가 엘레노어 하트니의 충고다. 역시 1992년 국립 현대미술관의 백남준 회고전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가?”라는, 유홍준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참으로 멍청한 질문’에 대한 엘레노어 하트니의 답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코로나 사태 이후 방역에 있어선 한국이 선진국을 앞서가고 있는 된 이 시점에도 유의미한 충고인지는 모르겠으나, 컨스트럭션과 디컨스트럭션에 대한 이야기에서, 작가가 '건설'하고 또 '탈구성'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 출발점은 ‘삶 자체’ 아니겠는가?라는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결론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인용한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나는 파리의 우버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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