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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컨스트럭션&디컨스트럭션3
딱딱한예술&부드러운예술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컨스터럭션&디컨스트럭션 3  딱딱한 예술&부드러운 예술 

바그너, 음악音樂보다 음향音響 & 브람스, 음악音樂보다 음학音學 그리고 세잔느


 

고흐, 타라스콩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화가 (1888년) 이미지 출처:http://m.blog.yes24.com/woojukaki/post/8310834


“… 반 고흐는 예술을 무서우리만큼 진지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 중에 작업에 나서는 자기를 그린 것이 있다. 그림 중의 고호가 드리우고 있는 긴 그림자는 베이컨에게도 인스피레이션을 주어 일련의 수작이 완성되었다. 우리들은 여전히 그러한 그림자를 먹으면서 몸을 보양하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을까이다. 아마도 모든 그림자가 탕진되고 사물이 단순 물질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술은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예술이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예술의 종언, 예술의 미래 ‘, 클라우스 푸스만 ‘자기 자신을 찾는 미술’, 116 페이지, 느티나무.


다른 분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미술, 그것도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에 인용한 클라우스 푸스만의 지적 역시 같은 맥락이다. 


모던 이전의 미술은 하나의 '덩어리'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그림자가 바로 '근대미술'이라고 한다면, 그 '근대'라는 모던 이후 우리 시대까지의 미술은 여전히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다. 하여, 적어도 미술에 있어 우리 시대의 미술은 아직 그림자를 드리울 시기가 아닌 셈이다. 


무엇인가 '해체'하기보다는 여전히 '건설'을 해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은 조급하게, '컨템퍼러리 아트(동시대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시대의 미술을 '규정'지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15세기의 미술사가, 르네상스 미술을 집대성한 죠르죠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도 '컨템퍼러리(동시대)'란 단어는 등장한다. '컨템퍼러리(동시대)'는 하나의 사조일 수 없다. 모든 시대가 그 서있는 시점에선 '동시대'인 것이다. 


어떠한 '덩어리'도 어떠한 '결과물'도 나오지 않는 현재의, 우리 시대의 '미술'을 두고 '동시대 미술'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더 이상 하나의 커다란 내러티브나 사조에 지배당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찍이 아서 단토가 '예술의 종언'을 이야기하며, '창작 행위가 끝난 것이 아니라' , '과거와 같이 큰 사조나 큰 줄기(내러티브)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컨템퍼러리에 대해선 '너무나 다양하여' 하나의 흐름으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즉 다원주의가 도래했다는 것인데, 거대한 하나의 사조로서는 정리가 불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않다면, 아니, 적어도 이 시대의 우리 시대의 미술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다면, 힘써야 할 것은 다시 컨스트럭션의 문제이지 디컨스트럭션의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아주 보수적으로 건설에 힘써야 할 때다. 모던 미술이 환갑을 넘어 칠순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그너와 브람스에 대한 엘마 붓데의 시선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그래서 작곡가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 알반 베르크와 안톤 베베른에 특히 영향을 주었던 것이 다름 아니라 브람스적인 작곡이었고, 바그너 악극의 복잡한 음향 세계가 아이 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 (예술의 종언, 예술의 미래 중, 엘마 붓데, 앞을 향한 회상, 58페이지) 


‘새로움’의 발단이 브람스로부터라는 엘마 붓데의 주장(지적)은 의외다. 실상 파격적인 개혁파였던 바그너로부터 ‘새로운’ 전통이 계승될 것이라 그의 시대에 예상했지만, 바그너는 바그너로서 유일했고, 쇤베르크라는 신新음악의 시작은 바그너가 아닌 브람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왜일까?


바그너는 부술 것이, 부술 수가 없는 음악이었다. 소위 ‘탈구성’, ‘해체’가 불가능했다. 그의 음악은 역시 해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미 해체되었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미술처럼 가스상태였다. 가스를, 기체를 어떻게 부순다는 말인가?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상태의 근대’처럼, 바그너의 음악은 단단한 무엇이 아니었다. 이 글의 제목처럼, 딱딱한 학문과 부드러운 학문으로 구분한다면, 부드러운 학문에 속하는 음악이었다. 


반면, 브람스는 부술 것이 있었다. 부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부서지는 것은 브람스의 음악이 아니다. 부서지는 것은 브람스가 완성한 음학音學이다. 그것은 모욕도 배신도 반발도 아니다. 브람스가 남겨놓은 완성해 놓은 유산으로부터 새로운 음악이 태어나는 것이다. ‘스승보다 못난 제자는 스승에 대한 모욕이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스승이 견고하게 이루어 놓은 것을 하나씩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바그너와 브람스, 음악音樂보다 음향音響, 음악音樂보다 음학音樂


바그너는 음악보다 음향에 더 애착을 갖었던 듯하다. 그의 음악은 적어도 나에겐 참 달랐다. 바그너의 음악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어본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무대에 올리는데, 비디오 아티스트인 빌 비올라가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직후였다. 


박사 준비과정(DEA)에서 비디오 아트 부분의 세계적인 석학이었던 안 마리 뒤게의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수업에서 빌 비올라를 알게 되었다. 한참을 뒤늦게 알게 되어, 그의 전시를 보러 영국까지 달려갈 만큼 한동안 푹 빠져있던 차에, 그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참여한다는 소식은 너무나 신선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왜?” “어째서 바그너인가?”.


빌 비올라의 작업은 첨단의 기술을 이용한 비디오 작업이지만, 그의 영상을 이루는 틀은 철저히 ‘고전적’이며, ‘르네상스’적이다. ‘음악적 리듬감’ 녹아있는 극도로 느린 슬로 모션과, 철저하게 계산된 화면 구성 그리고 원근법적이고 숭고한 이미지들은 영락없이 르네상스 회화를 동영상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빌 비올라 작품 이미지 출처 : https://www.lecho.be/dossiers/bill-viola-michel-ange.html



빌 비올라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그너의 음악을 들어보기로 했다. ‘트리트 탄과 이졸데’ 3장으로 된 CD를 구입했다. 연주시간만 4시간 반에 가까웠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해가 될 때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매일 저녁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작업하며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들었다. 고역이었다. 하루 5시간 고된 일을 하고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하나도 이해가 안 가는 음악을 4시간이나 듣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그러나 왜 빌 비올라가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는 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선택했고, 또 바스티유는 왜 빌 비올라를 끌어들였을까?


얼마나 들었을까? 이제 들으면 어느 부분인지는 몰라도 ‘트리스탄’이구나 라고 알게 될 때까지 들었지만, 결국 이해를 할 수 있는 대목을 찾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시간에 밀려 공연도 보지 못하고 그렇게 흐지부지, 답을 찾지 못한 채 잊힌 질문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글의 초안을 쓰며, 이제야 왜 빌 비올라와 바그너가 어울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바그너의 음악은 ‘연기’ 같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음악’보다 ‘음향’ 같았다. 그렇다 보니, 빌 비올라의 ‘흐르는 듯’한 영상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반면 브람스는 어떤가? 브람스는 멋이라고는 없다. 당최 곡의 시작도 촌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브람스의 애호가들이 들으시면 성을 내시겠지만, 적어도 내겐 그러했다. 브람스는 음악이 아니라 음학 같았다. 


세잔느와 같은 브람스 


“사람들은 예술의 순교자를 이야기할 때 반 고흐를 이야기하는데, 내가 보기에 진정한 회화의 순교자는 세잔느예요.” 안타깝게도 일찍 돌아가신, 윤운중 선생의 말이다. 나도 가이드 일을 해보았고, 루브르며 오르세이, 프랑스 전국을 다니며 설명을 하고 안내를 하고 다녔지만, 운운중 선생의 강연을 한번 듣고는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절감하고 또 절감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천 번 간 사람'으로 유명했던 윤운중 선생은 안타깝게도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가 담고 있는 그 많은 지식이 참으로 그립다. 


선생의 강연중 세잔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 누구도 세잔느에 대해 속시원히 설명하는 책을 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며, 세잔느야말로 평생을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그 물음에 답을 찾아 평생을 묵묵히 걸어갔던 화가였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생의 마지막도, 그렇게 그림을 그리러 가다 비를 맞고 쓰러져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물이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수건마저도 석고에 담가 궅혀서 그렸던 사람. 가능한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과일을 찾아, 사과를 정물 소재로 그렸던 사람, '아담의 사과'와 '뉴튼에 사과'에 이어 인류사를 바꾼 세 번째 사과는 '세잔느의 사과'라고 하지 않던가?(내 생각에 네 번째 사과가 새로 나왔는데, 그것은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다. 그래서 세잔느로 먹고사는, 세잔느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의 중심가 입구에 애플 매장은 정말 절묘한 선택이었다!)


 “잘 그려진 사과는 먹고 싶게 만들지만, 세잔느의 사과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말처럼, 세잔느의 그림은 ‘직접적인’ 아름다움 이라거나 ‘잘 그렸다!’라는 찬사를 불러일으키는 절묘한 시각적 기술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는 선으로 그리고 색으로 또 구성으로 회화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그렇게 그렇게 찾아 해 맨 화가였다. 


브람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음악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자세한 화성학이나, 다른 어떤 음악사적 의의가 브람스에게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음악은 적어도 1차적인 귀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닌 아름다운 선율이나 화음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음악이라는 것의 본질에 다다르기 위한 고되고도 질긴 여정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대가들은 정상에서 만난다고 할까? 바그너는 음들을 섞어 음향으로 기가 막힌 음색들을 만들었다면, 대위법의 대가였던 브람스도 마찬가지로 음학을 하면서도 아름다은 음향들을 쏟아 내었다.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지만 브람스의 곡들을 잠자코 묵묵히 들으면 스토리가 느껴진다. 


바그너는 자신이 음악 이론가였고, 미래의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이 있었다. 종합예술적인 그의 견해는 지금 시대에 오히려 더 잘 맞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것도 맞다. 때론 미디어쇼나 언젠가부터 대세인 설치미술이나 퍼포먼스를 보며, 특히나 올림픽 개막식과 같은 스펙터클을 보다 보면 어쩌면 바그너가 그린 세상에 우린 이미 와있는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진정한 현대음악을 연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이 당시 훨씬 시대를 앞서간 바그너가 아닌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이었던 브람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엘마 붓데의 지적이 옳다면, 어쩌면, 지금의 미술이 해야 할 것은 따라가지 못할 신기술에 발맞추어 이 시대의 미술이라고, 컨템터러리 아트라고 채워나갈 것이 아니라, 고리타분한 브람스의 음악처럼 벽돌을 한 장씩 얹듯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나는 파리의 우버 운전사


프랜시스 베이컨, 반 고흐의 초상화를 위한 습작 lll(이미지 출처:http://m.blog.yes24.com /woojukaki/post/8310834



윤운중 선생 강연

https://www.youtube.com/watch?v=ExY9lTSsi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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