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09 브람스, 브람스, 브람스 그리고 토니 모리슨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Love is never any better than the lover' - Toni Morrison

'사랑은 절대 사랑하는 사람보다 소중하지 않다.' - 토니 모리슨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토니 모리슨 그리고  요하네스 브람스... 사랑보다 연인을, 그리고 아름다움보다 음악을 




‘실패했을 때 들으면 위안이 되는 음악’ 무식한 내가 브람스의 음악에 대해 내린 정의였다. 무지했다. 무지하니 용감했다. 그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그의 음악 몇 곡을 듣고 저렇게 정의 내린 것이다. 물론, 무작정 부정적인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난 브람스야말로 뛰어난 작곡가 이전에, 도전하고 또 도전한 위대한 '한 인간'으로 느껴졌을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 실패했을 때, 슬럼프에 빠졌을 때, 브람스의 교향곡을 들으면 위안이 됐었다.


타고난 모차르트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맨티즘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쇼팽, 우수에 찬 차이콥스키, 맹렬한 카리스마의 바그너, 성스러운 바흐, 또 세속적으로 성스러운 헨델, 전 유럽의 귀부인들을 사로잡았던 파가니니, 또 금발의 왕자님 리스트... 이렇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타고난 멋쟁이 음악가들 중에서, 내게 비친 브람스는 일단, 옷을 못 입고, 뚱뚱하며, 고지식하고 꽉 막힌, 정말 안 타고난 것 같은 그래서 소위 ‘앳지’ 없는 작곡가처럼 보였다. 


심지어 클라라 슈만과의 그 유명한 순애보를 들은 이후로도 나의 브람스에 대한 인상은 변하지 않았더랬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한참 베토벤의 합창을 들을 때, 나의 한 친구는 “이것이 10번 교향곡이야.” 라며 브람스 1번을 내 앞에서 한참 설명했지만, 난 그 이후로 30년이 넘도록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의 음악을 들게 되었다.


'글은 쓰는 게 아니라 오는 것'.이라고 했던 어떤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음악을 듣는 시기도 그런 것일까? 아직 때가 아닌 듯하다가, 언제 들어보려나 하다가 '불쑥'하고 계기가 마련되고, 그러고 듣게 된다. 4개의 교향곡, 120여 개의 작품.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어느 것 하나 멋들어지게 시작하는 것이 없다고 느껴졌던 그의 곡들을 나도 모르게 작품 번호 1번부터 하나씩 하나씩 다운을 받아 ‘브람스' 폴더에 담고 있는 것이다.


작품번호 68번은 교향곡 1번이다. 작곡에 무려 20여 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작곡된 것인지, 스케치만 해두었던 것을 20여 년이 훌쩍 지난 뒤에 완성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베토벤 이후를 기다리던 유럽 음악계에 하나의 구원처럼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의 유명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뵐로의, "우리는 이제 10번 교향곡을 얻었다."는 말로 이곡은 베토벤의 대를 잇는 교향곡이 되었다.


"거인이 내 뒤로 항상 뚜벅뚜벅 걸어온다고 생각해보게.."라고 말했을 정도로 브람스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띄워준 스승 슈만의 기대도 그렇고, 무엇보다 연모하는 클라라까지 있으니 얼마나 잘 해내고 싶었을까? 게다가 그의 꽉 막히고, 고지식한 성품은 절대 음악을 찾아가기엔 안성맞춤 어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승의 뒤를 이어 오페라는 한곡도 작곡하지 않은 의리파이기도 하였던 브람스.


브람스의 교향곡은 총 4곡이다. 많지 않은 숫자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멋없는, 고지식한 ‘공부’ 같은 네 곡의 교향 곡안에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선율이 하나씩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가슴이 돌덩이일 것 같은 그에게서 CF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 또는 방송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하는, 우리의 귀에 익숙한 아름다운 소절들이 어떻게 나왔을까..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멋이라곤 없는, 감성이라곤 없을 것 같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남자를 합쳐서 강원도 산골에 처박혀 있을 것 같은, 그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로맨틱한 선율이 나올 수 있었을까? 난 여전히 답을 모른다. 그리고 브람스의 음악에 대한 내 편협한 판단 역시 언제 바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그의 피아노 소품 118번의 두 번째 곡, 이 곡만큼은,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곡이다. 이토록 멋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그 누구보다 로맨틱할 수 있는 이유를 말이다. 


브람스의 말년의 자화상 같은 피아노 소품 118번 두 번째 곡

op.118 6개의 피아노 소품 2번 인터메조 A장조

Brahms : 6 Klavierstücke Op.118 No.2 Intermezzo in A major


그냥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을 맴돈다.

또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위한 그를 위한 곡을 쓰다가, 또 글을 쓰고.

그렇게, 그렇게 사랑이 아닌 연인을 지키다. 그렇게 늙어갔다.

물론 내가 비장한 어조로 브람스가 평생 클라라 슈만 한 사람만을 사랑한 것처럼 이상화시키고, 우상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브람스는 약혼의 경력도 있으며, 말년엔 재능 있는 미모의 클라리네티스트로부터 영감을 얻어 절필을 선언한 이후에도 클라리넷을 위한 여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 만은 안다. 클라라가 죽고 난 뒤 1년 뒤 브람스도 세상을 떠난다. 마치 형을 죽고 1년 뒤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난 반 고흐의 동생 테오처럼 말이다. 


클라라에 이어 세상을 떠난 것이 우연일 수도 있다, 평생 클라라를 연모하다가 늙어갔다는 추측 역시도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곡 op. 118의 두 번째 소품을 듣다 보면, 평생을 음악音樂이 아닌 음학音學을 위해 살아온 한 작곡가의 돌덩이 같은 무뚝뚝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렇게  길고, 또 지루했을 그 시간들로 굳어진 단단한 마음들이 아름다운 선율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평생을 기다리기만 한 그의 그 무거운 시간들... 그리고 그렇게 무거웠고 길었기에, 포기도 분노도 아쉬움도 또 여한도 없이, 그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괜찮소’라고 말하며, 자신이 걸어온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이야기하는듯했다. 


격정도 없었고, 비장한 슬픔도 없었으며, 그저 우아함만이 있었고 격조만이 있었다. 멋은 없지만, 그렇게 뒷짐을 지고 숲길을 산책했을 그의 모습처럼, 그 음악은 그가 사랑해온 길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사랑보다 연인이 더 소중하다'는 토니 모리슨의 말처럼, 그는 너무나 사랑하였음에도, 그 사랑보다 연인이 소중했기에, 클라라를 그렇게 평생 보살폈고, 그의 사랑은 돌이 되었고, 자신은 그렇게 생의 마지막에 음악으로 수를 놓았다. 


브람스와 클라라의 마지막 만남에서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이곡을 연주해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사양하는 클라라에게 거듭 청해 연주를 듣게 된 브람스. 뒤에서 바라보았을 그의 눈가엔 눈물이 고였을까.. 아니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을까? 알 수 없다...

 


영화 샌스 &샌서빌리티의 한장면 


비가 오는 날 차 안에서 이곡을 들었을 때, 나는 '센스&센서빌리티'의 엠마 톰슨이 생각났다. 영화 '센스&센서빌리티'에서도 그랬었다.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성격을 나란히 지닌 자매가 있었다.  감성적이고 솔직한 동생과 이성적이고 모든 것을 참고 인내했던 언니. 사랑에 솔직히 덤벼들어 열병을 치르며 연인을 쟁취한 동생이 있었고, 평생 사랑하는 이를 두고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언니가 있었다.


영화의 끝자락에, 평생을 연모했던 사랑으로부터 고백을 듣게 된 언니는 목을 놓아 운다. 체면도 없이 '꺼이꺼이'하며 짐승처럼 우는 그 모습에, 그녀가 평생 안고 엤었던, 연모의 깊이가 느껴져 마음이 먹먹했었다. 브람스의 op118번의 두 번째 곡도 내겐 똑같은 풍경이었다. 브람스가 죽기 4년 전인 1983년에 쓰인 이곡을 듣다 보면, '이 사람이 정말 평생 기다렸구나..'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실패했을 때 듣는 음악은 여전히 내겐 브람스다. 흐리고 비가 오는 날에도 어김없이 브람스 118번이다. 창작이 풍요로운 시대라고 하지만, 이런 곡이 또 나올까 싶다. 평생을 기다리기엔 세상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참으로 위대했다. 그것은 그의 삶의 깊이, 노력의 깊이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상처의 깊이'라는 생각이 들때는 마음이 다시 먹먹해진다. 



- 나는 파리의 우버 운전사 


ps밀회에서 극 중 인물 선재(유아인)가 오혜원 실장(김희애)에게 바쳤던 곡이 바로 브람스의 118번이었다. 정말 음악 감독의 실력에 경의를 표한다…


ps 브람스 118번, 두 번째 곡, 피아노의 음유시인 백건우 선생 연주

(영상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s4aZEeHlBA)



매거진의 이전글 08 컨스트럭션&디컨스트럭션3 딱딱한예술&부드러운예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