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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클래식음악이 주는'소외감'그리고 관객의 '복수'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클래식 음악의 ‘폭력성’과 ‚관객의 복수‘    




“박하우스와 뵘이야.” 하고 레이코 여사는 말한다. 그리곤 덧붙인다, “LP판이 닳도록 들었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무라카미 소설 ‘상실의 시대’에 주인공 와타나베가 정신병원에서 만난 레이코 여사와 나누던 대화의 한 대목이었다. 

소설 속에서 음악을 많이 듣는 것으로 나왔던 와타나베도 클래식 음악에 관해선 전문적이지 않아 보였다. 레코드점의 동료와 가진 술자리에서도 클래식 음악, 특히 모차르트의 아름다운에 대해 이야기하던 동료의 말을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는다. 


앞서 언급한 ‘박하우스와 뵘’은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와 지휘자 '칼 뵘'을 말하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이름들이다. 소설 속에서,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갯츠비'를 세 번이나 읽었다는 해박한 주인공조차도 그저 박하우스와 뵘 정도 알고 있는, 클래식이라는 고고한 성채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클래식 음악이다. 



클래식과 대중


클래식 음악계의 인사들 중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일 것이다. 그가 베를린 필의 종신지휘자였다는 사실보다, ‘응답하라 1988’ 시대에 존재했던 선물가게와 액자가게에 단골로 걸려있었던 것, (눈을 감은채 지휘봉을 가지런히 쥐고 있던) 그의 사진 때문이었으리라. 



늘 눈을 감고 암보로 지휘를 했던 카라얀, 그가 1989년 세상을 떠났을 당시 KBS는 추모방송을 내보냈다. 방송 자막에 동서화합의 상징이었고 클래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내용이 화면 하단에 흘렀다. 


전자는 맞는지 모르겠으나 후자는 분명 맞다. 카라얀은 수많은 레코딩을 통해 클래식의 대중화에 한몫을 했으며 '철저하게 미적인' 자기 관리와 탁월한 영상제작으로 클래식의 문턱을 한껏 낮추어 주었다. 물론 전문가들 사이에선 늘 똑같은 연주라는 혹평이 존재하지만 어찌 되었거나 전문 음악 학도가 아닌 많은 대중들에게 그는 탁월한 안내자였다. 


어쩌면 전문가들의 카라얀에 대한 혹평은, 자기들끼리만 알아야 하는 클래식의 세계를 너무 대중화시켜 버려서 텃세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카라얀 이후 대중들에게 탁월한 강연을 선보였던 레너드 번스타인 그리고 한국의 지휘자 금난새까지,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이 더 많은 대중에게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려고 아낌없는 노력을 쏟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이 주는 ‘거리감’은 여전하다. 이 묘한 ‘거리감’은 무엇일까?



클래식음악이 주는 묘한 거리, '소외감'


1989년 카라얀이 서거한 해부터 시작된 나의 클래식 음악 듣기도 이젠 햇수로 30해를 넘기고 있지만, 여전히 난 새로운 곡을 들을때마다 클래식 음악에 '소외'당하며 산다. 

클래식이 주는 막연한 거리감은 바로 ‘소외감’을 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박하우스와 뵘이야'에서도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가 되어가면서 까지 , 소위 ‘굴욕감’을 느껴가면서 까지 클래식을 꼭 들어야 하나? 



바르톡의 피아노 협주곡


가장 최근, 아주 오랜만에 '깊은 고독감'을 안겨준 것은 바르톡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처음 그 곡 실황을 들었을 당시의 그 참담함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차 안에서 혼자 들었기에 망정이지, 공연장에서 직접 들었다면? 행여 내가 들은 그 유튜브 연주 실황의 공연장에 있었다면, 난 고개를 떨군 채 자리를 빨리 떴거나, 짐짓 아는척하며 박수를 치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장내가 떠나갈 듯 환호하는 수많은 관객의 박수와 함성을 들으며, 정말 난 외로웠다. ‘폭력’에 가까운 ‘소외감’이었다.  


‘어떻게 이 수많은 사람들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음악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ㅠㅠ ㅠㅠ” 정말 ㅠㅠ ㅠㅠ 눈물 표시를 아니할 수 없을 만큼 당시 난 울고 싶었다. ‘이게 왜 좋지?’ ‘뭐가 좋은 것일까?’ 


대개의 현대음악이 그렇듯 도무지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모르는 그 음악들 속에서 어떤 지점에서 감동을 하라는 것인지 난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듣고 또 듣다가...


아이를 데리러 차로 가는 시간은 20분에서 30분, 매일 한곡씩 듣기로 한 계획에서 첫곡으로 고른 바르톡의 피아노 협주곡에 크게 상처 받은 나는 오기가 생겨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계속 그 이해가 되지 않는 곡을 듣기 시작했다. 들어도 들어도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고, 좋아하고픈 대목도 발견하지 못했다. 수개월이 지나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선율조차 기억나지 않으며, 그저 나 빼고 모두 환호하던 관객들의 함성들만 기억이 난다.



노력의 산물..


그러나, 며칠간의 고된 반복 감상 후에 한 가지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음악인지 또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고른 연주 영상의 엘렌 그뤼모라는 피아니스트가 정말 열심히 피아노를 친 것 같았고, 또 그렇게 연주를 하기까지 참 부단한 노력을 했겠구나..라는 생각이 가슴으로,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곡해 일지 모르나, 어쩌면 그 수많은 청중들의 환호란, 바르톡 음악을 탁월히 해석한 앨렌 그뤼모에게 던지는 찬사가 아니라, 연주를 무사히 마친 피아니스트에 대한 그간의 노고와 노력에 대한 찬사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저 실수없이..


그러고 나서 얼마 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서울대 음대 대학원생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를 듣게 되었다. 치기 힘든 곡이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되었으나 실수가 너무 많았다. 그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던 바르톡의 피아노 협주곡과 관객들의 함성이 다시 떠올랐다. 그저 실수 없이 연주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관객은 틀린 부분만 듣는다."


그 서울 음대생의 연주 이후 난 어떠한 음악가도 섣불리 해석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냥 틀리지 않고 무사히 연주를 마치는 것만으로도 관객으로서 감사할 일인 것이다. 지난해 350주년을 맞은 파리 오페라단의 단장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관객들을 틀린 부분만 듣는다.”라고...




'관객의 복수'


클래식 음악이 '소외감'으로 관객에게 면박을 준다면, 관객은 잘 알지 못하면서 꼭 틀린 부분만 집어내서 다시 죄 없는 연주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소외감도, 또 면박도 없이.. 그저 음악가는 열심히 음악을 연습하고 연주할 뿐이며, 관객은 그저 들어주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소박한 두 세계가 만날 때의 감동이란... 두 우주의 만남, 저 하늘의 은하수 같지 않을까... 수많은 음악가들이 또 비평가들이 어떻게 던 클래식 음악을 알리려고 한 것은 그것이 그만큼 큰 위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아.. 아직도 설명이 부족하다… 설득이 안 된다ㅠㅠ)



그린버그의 고백


엉뚱하게도, 모더니즘의 문을 열었던 딱딱한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말년의 소회가 생각난다. 평생에 걸쳐, 미술을 '모던'이라는 틀에 가차 없이 꾸겨넣어버린, 단토가 미술사의 두 번째 거대담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 ‘모더니즘 내러티브’의 산증인, 그렇게 철저하게 평생을 인식론적인 분석과 해석으로 모던 미술의 이론적 성채를 쌓았던 그가, 그렇게 해서 수많은 이들이 미술로부터 '소외'되도록 만들었던 그가, 말년에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기준들이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미술과 나쁜 미술 사이의 차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말입니다. 예술작품들은 당신을 많든 적든 감동시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여태까지 말은 이 문제에 있어서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미술과 미술가에게 처방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나는 것을, 즉 예술가가 하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현대 미술도,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또 싫으면 싫은 것이 아닐까. 음악도 마찬가지 내가 좋으면 요즘 대세인 트롯도 좋고, 또 내가 싫으면 타임지가 인류사의 최고의 곡으로 꼽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도 별로 일수 있다. 


그런데, 사실 난, 내가 미술을 하고 있지만, 늘 미술보다 음악에 더 후한 점수를 준다. 왜냐면, 음악은 그래도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는 욕을 안 먹지만 노래를 못하는 가수는 살아남지 못한다. 



빌헬름 박하우스 그리고 탄광 노동자


첫머리에 언급한 박하우스라는 피아니스트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피아노 위에는 탄광촌 광부의 사진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기자가 물었다. "이 사진에 왜 여기에 걸려있나요?"라고, 박하우스가 답했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저들의 힘든 노동보다 훨씬 쉬운 일이라는 것을 늘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음악가와 노동자


 고상하고, 우아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한 사람의 '노동자'로 연대 의식을 지닌 거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연주한 음악은 한번 들어주고 싶어 진다. 탄광의 광부들이 어렵게 케낸 석탄으로 가정이 따뜻해지고,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에너지로 쓰이듯이, 피아니스트들의 그 수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연주된 곡들은 많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 준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를 열손가락으로 들어올리는 일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박하우스는 피아노를 치는 것이 광부의 일보다 훨씬 쉬운이 일어서 그렇다고 하셨으나, 일찍이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전향한 정명훈은 "피아노를 치는 일은 열개의 손가락으로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어 올리는 일."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힘든 작업이라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위한 변명


긴 시간의 노력과 고독이 필요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그 외롭고 긴 길의 끝에야 그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는 것일 테니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는가? 나에게 여전히 '소외감'을 안겨주지만, 클래식 음악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클래식 음악을 위한 작은 변명이었다.


-나는 파리의 우버 운전사


빌헬름 박하우스와 칼 뵘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고 2번

(영상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D3k2a4Gi0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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