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과 함께
꼭 봐야지, 오랫동안 되뇌이던 영화. 드디어 숙제하듯이 보게 되었다. 마음이 축축 무겁게 젖었다.
한국영화의 이해라는, 저번 학기 어쩌면 가장 많은 것을 남기고 간 수업에서 접하게 된 영화. 당시 아마 누군가의 발표 때문에 짧게 클립 정도도 보았던 것 같다. 예고편 영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줄거리를 이미 대략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뒤늦게 2시간 남짓한 생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떠올랐다. 작가, 감독을 원망하게 될 정도로 주인공에게 너무 잔인한 시나리오. 그 누구보다 선량한 주인공이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본다는 것은 여전히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마츠코와 앨리스는 아주 많은 면에서 다르고,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츠코가 가족, 트라우마, 남자로 이어져 인생이 왜곡되고 수렁으로 빠진다고 한다면 앨리스는 사회 소외계층이 용을 써도 본래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고 심지어는 계속 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그렇기에 다분히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츠코는 사랑 그 자체에게서 칼을 맞는다면, 앨리스는 사랑을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미쳐가고, 결국엔 방해가 되는 모든 이들을 조금 허구적인 방식으로 제거해나간다.
수없이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무책임한 의료사고, 어이없는 산업재해부터 치솟는 집값과 아무리 죽어라 노동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고리, 재개발을 둘러싼 이기주의와 난투극. 그리고 그 밑에 깔려있는 여자의 사랑과 남자의 절망은 소름끼치게 아름다우면서 처절하다.
앨리스 손에 죽어나간 모든 이들에게 앨리스는 ‘미안해요. 죽일 수 밖에 없는 거 이해해줘요.’라고 말한다.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어 미안한 사람들. 무자비해 보이는 소위 ‘악역’들도 사실, 제 나름의 삶을 왜곡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형사들은 동정심과 책임감을 조금씩 지닌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까지 희생시켜버린 의도는 무엇일까.
악역만을 죽인 앨리스의 칼을 나는 어쩌면 응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제 좀 행복해지겠구나. 악역들을 무찔렀으니 이제 좀 나아질거야. 그런데 뜻밖에 그 칼이 향한 ‘일반 사람들’.
어쩌면 그 악역이 앨리스를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수없이 엉킨 사회적 병폐들, 불평등, 이기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나 같은 일반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수없이 외치는 그녀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싸늘한 사회는, 소외된 자들에게는 몽땅 악역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왜 누군가는 아무런 안전망 없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야만 하는가.
문득 EIDF 기간에 접했던 다큐멘터리 ‘휴먼’에서, 얼굴에 파리가 앉는지도 모르고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저희는 굶어 죽습니다! 세계의 높으신 분들! 제 목소리를 들어주세요!”하고 외쳤던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왜 그들은, 그래야만 하고, 왜 나는, 가만히 엎드려 아늑한 방 안에서 모니터로 그들을 만나는가.
내가 덮는 이불, 나를 안아주는 엄마, 서울 역세권에 버젓한 집, 주차장에 잠든 차, 그럼에도 내 한 몸과 내 가족을 위해서 온 신경을 쏟고 있는 현실.
어쩐지 편치 않은 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