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
소식을 하다보면 양이 줄어들 듯이 인간이라는 것도 만나지 않다보면 필요량이 감소한다. 물론 자기 연민은 금물이다. 자기 연민은 가끔이야 달콤할지 몰라도 오래 하다보면 괴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은 에일리언처럼 숙주를 완전히 먹어치운다. 나는 바보다. 매력도 없다. 사람들은 나를 벌레 보듯 여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나를 피하지. 내가 잘하는 게 뭐 있겠어? 물론 이런 자학에는 쾌감이 있다. 문제는 스스로를 효과적으로 잘 괴롭혀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더 가혹한 자학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자학과 가학의 화려한 탱고! 그러므로 자기 연민은 금물이다. 그저, 침묵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그리고 음악이나 일에 몰두할 것.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런 해피엔딩이 정말 가능할까? 진실은 할리우드 영화처럼 두 시간 안에 밝혀질 수 있는 걸까? 아니 두 시간 안에 밝혀지는 것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건들이 이런 화려한 클라이맥스와는 관련 없이 은폐되거나 유야무야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지금, 그러니까 21세기에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쓰는 것은 온당한가의 문제.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 권선징악을 이야기 속에서 기대하는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내 부족한 식견을 동원해서 소설을 읽으려다보면 보통 두 갈래의 감상을 갖게 된다.
어려워서 몇 번씩 되새김질을 해야 소화가 되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게 되고, 그렇다보니 속도가 잘 나질 않고, 천천히 걷다보면 들꽃에 눈이 가듯 좋은 구절들을 발견하고, 아껴 읽고, 다시 속도가 더 느려지는 그런 책과,
속에 담긴 함축적 의미를 넘겨버릴 정도로 서사가 흥미로워서 전투적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책이 있다.
전자는 보통 작가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있고, 간간히 작가의 목소리로 사물과 세계에 대해서 감상을 늘어놓곤 하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시선을 가졌을까’하고 놀라곤 한다.
후자는 스토리 자체가 긴밀하게 엮여있어 작가의 목소리가 끼어들 자리가 상대적으로 적고, 또 끼어든다 할지라도 스토리에 매혹된 (아둔한) 나는 듬성듬성 뛰어넘고 주인공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아랑은 왜’는 내 미천한 표본집단을 꼬집는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두 부류에 전부 해당하는 소설이었다. 처음 보는 류의 화자가 나와 함께 소설을 써보자고 제안하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렇게 갈까? 저렇게 갈까?하며 상의를 하기 시작한다. 초입은 나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나비가 되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아랑 설화에 관한 이야기, 이후 아랑 설화를 재구성하고자 등장인물부터 이야기흐름까지 하나씩 선택해나간다.
뿐만 아니라 구조면에서 감탄스러운 부분은 단연 ‘박’과 내부 서사가 교차되는 부분. 작가는 능청스럽게 ‘내가 써둔 소설 초반부는 이래~’라고 시작해놓고, 소설 끝맺음은 외부 서사의 중심인물인 그 ‘박’이 쓰기 시작하는 소설의 내용...은 다시 소설의 맨 첫번째 구절이다. 이밖에도 단순히 ‘구조’면에서만도 감탄할만한 내용이 정말 많았다. 흥미롭게 이야기를 한 단원 풀어내고서 ‘별로다’하고 철회하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구구절절한 작가의 식견. 나비에 관련된 설명에서부터, 역사기록, 설화에 관한 세세한 내용들은 길이로만 봤을 때 장황해질 법도 한데 소설의 서사 그 이상의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필체는 담담하고 전혀 부풀림이 없는데, 내놓는 이야기들은 그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금세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외부서사든 내부서사든 시대상에 관한 것은 자세하지 않았는데, 대신 미시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파악하지 못한 함축적 의미들과 시대상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옥같은 설명들이 많았는데, 아까 나열한 부류 중 후자에 조금 더 가까웠던만큼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많은 것들을 적어두진 못했다.
그리고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페미니즘적 서사들이 두 번이나 스토리 ‘후보군’으로 제시되었다는 것.
첫 번째는 역사 기록 앞에서 어떤 이는 ‘경상도 밀양땅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죽였다’는 것에 집중, 조선시대 관료제의 부패상과 연결짓지 않고 “수많은 조선의 다른 여인들처럼 남자들에 의해, 남자들이 만든 시스템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그러니 그것에 대해 쓰면 된다고. 그가 쓰는 이야기는 환상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페미니즘소설이 될 것 같다.”고 언급한다. 물론 화자(=작가? 아직도 혼란스럽다)는 이 후보군을 채택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언급만으로도 그가 평소 생각하고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짐작케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결말을 내기 이전, 화자가 등장인물들에게 결말을 어떻게 낼지 물어보는 부분. ‘박’의 역할을 맡은 인물(혹은 ‘박’)은 ‘박’이 ‘아랑’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며 아랑이 우리 마음 속의 욕망과 죄의식을 의미하지 않겠냐고, 그러니 살인자인 ‘박’에게 가면 자연스럽지 않겠냐고 답한다. 여기에 ‘영주’는 “어린여자 밝히는 ‘박’한테 살해된 건데, 이건 그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일 뿐, 여기다 무슨 다른 상징을 덧씌우는 건 전 반대합니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인 여성을 신비화하는 것은 남성 작가들의 전형적인 폭력입니다. 사실 전부터 말하려고 했지만 참다보니 이제야 얘기하게 됐습니다.”라고 답한다. 이후 작가와 영주는 잠시 투닥거리고, 작가는 기술적으로 만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하겠다 - 예를 들면 이렇다 - 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우리는 복잡하고 때로는 쓰잘데기 없어보이는 생각들에 침잠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여러 화자들이 둘러앉아, 서로를 논리적으로, 때로는 윤리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 요새 자주 맞닥뜨리는 갈등은 단연 ‘젠더’문제였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웃어 넘길 수 있지 않아? 그런 것까지 따지고 드니까 오히려 더 제약이 생기는 거라고.” “여성이 제 권리를 찾은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역지사지를 논하는 거야? 역지사지는 그럴 때 폭력이 돼!” 라는 류의 두 작자는 내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엉켰다.
나는 소설을 통해 작가가 발생가능한 민감한 것들에 얼마나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녔는지 감히 직감하게 되었다. 또 그것들을 딛고서라도 서사를 진행시키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이 서사로 상처를 받게되는 사람은 없을지 끊임없이 고려해보고 고쳐쓰는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고, 내 몫으로 주어진 리액션은 감탄 뿐이었다.
결국 내부서사와 외부서사는 신비롭게 봉합된다. ‘여우발’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아랑을 죽인 윤관과 이를 묵인한 자들, 영웅으로 둔갑했던 이상사, 어사 조윤, 탐정 노릇을 한 김억균 등의 내부서사 인물들은 외부서사의 ‘박’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박’이 영주의 자취를 태워 없애면서 “영주가 죽었다는 게 이제서야 실감이 난다. 좋다.”고 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맡겨졌다.
죽은 아랑은 정작 ‘저는 다 잊었어요. 그러니까 그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아저씨 이야기지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설화 속 인물이 수많은 화자들에게 전하는 이야기일까. 소설 속 인물들이 작가에게 하는 이야기일까. 혹은 지금도 머릿속 영사기로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나에게, 내 서사 속 인물들이 던지는 이야기일까. 어차피 ‘내 이야기’.
작가는 소설을 독자들과 전적으로 공유한다. 범접할 수 없는 천재적인 구성과 문체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면서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설화’의 모티브를 따 온 만큼, 독자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설화의 형식을 취해보는 것일까? 소설을 써내려감에 있어서 진솔한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함일까?
숨통을 붙잡고 밀고 당기고.
나는 그저 이 책을 수작이라 얘기하고 싶고, 이후로도 김영하의 모든 소설을 다 읽고야 말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