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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Happy Letter Aug 30. 2023

'금지된 사랑'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탐욕과 자유 의지의 경계


주말에 초고를 그대로 발행하려다가 퇴고를 거치면서 원래의 제목인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에서 결국엔 위의 표제와 같이 바꾸고 말았다.


요즘 안 그래도 사람들이 글은 다들 열심히 올리는데 잘 읽지는 않는다는 소문이 흉흉한데, 원제목처럼 밋밋하면 누가 읽어나 볼까 걱정되어 나름 좀 더 자극적으로 바꿔봤다.


물론 필자도 - 최근의 짧은 기간이지만 - 약간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머리 아픈 주제나 무거운 소재보다는 (조회수만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필자가 쓴 김밥, 모짜렐라 치즈, 소시지, 샌드위치, 망고(mango) 이야기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음식 이야기가 호응과 인기가 좋다고 해서 매번 음식 이야기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나저나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되더라도 제1번 독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필자 자신이며, 필자의 짧은 단상인 이 글을 구태여 여기 브런치스토리에 쓰고 남긴다는 것은 언제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리라 본다.


어쨌든 극히 개인적 단상이지만 "기억 서랍"에라도 저장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또 훗날 한층 더 성숙한 사유(思惟)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한 번 적어본다. (그리고, 오늘따라 유달리 서설(序說)이 길어진 이유는, 현재 아무런 확신이 없는, 그러면서도 사유의 복잡한 혼돈, 그 미완의 단계에 처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어떤 글을 읽다가 낯선 단어를 접하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인 것 같은데 필자인 나만 모르는가? 독자분들은 이미 다 아시는가?


바로 '배덕감'(背德感)이라는 단어다.


찾아보니 일본식 한자 조어(造語)라는 말도 있고 온라인 커뮤니티(community) 등에서 쓰인다는 말도 있는데 필자로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어 카카오 다음(Kakao Daum)에 한 번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어학사전]에도 나오는 말이었다.


배덕감(背德感) : "사회적 금기를 어기거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쾌감."


하, 이게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천수만 가지 감정과 욕구 중에 이런 감각(?)도 있었단 말인가?




기독교나 천주교로부터 (잠시만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라도) 듣기로는 우리의 "원죄"(原罪)가 성서 구약 창세기에도 나타나있는 바와 같이, 대개 다음과 같이 알고 있다.


(Source : Lutherbibel.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00. Stuttgart. Page 4, 1. MOSE 1. 2)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물론 여타 종교를 믿거나 혹은 종교 자체가 없는 분들은 이 글에서는 "선악과"(善惡果, forbidden fruit) 등 '금단의 열매'는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잠시 어떤 '메타포'(metaphor)의 일종으로 보셔도 될 듯하다.


필자가 하고 싶은 주된 말은 인간은 태초부터 이렇게 금지하는 것(금기 사항)을 어기는 욕구가 강했나 하는 것이다. ("죽는다."라고까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금기를 깨면서 어떤 쾌감("배덕감")을 느낄 정도라고 하니 그 욕구의 강도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며, 혹시 이런 욕구도 어쩌면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인간이 가진) 또 다른 '원초적 본능' 중의 하나인가 하는 의문이 들 지경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금기 사항'에 대한 유혹에 한없이 약하고 또한 '금지된 것'을 오히려 그 반대로 더 하려고 하는 걸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대개 의식주 등 기본 욕구나 니즈(needs)를 다 해결하고 나면 그때부터 더더욱 "이젠 남는 건 시간뿐이다"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인정받고 싶은 (숨어 잠재돼 있던) 욕구들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돈이 어느 정도(?) 있으면 명예도 누리고 싶고 돈보다 좋다는 "사람 거느리기"도 하고 싶어 진다. (혹시 이것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지금 보다 더 많은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고, 어떤 잠자던 욕망으로 새로운 사랑도 꿈꾸고. 이 모든 것은 그저 인간만이 갈구(渴求)하는 '자유 의지'인가? 아니면 나약한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의 하나일 뿐인가? 그 경계선은 어디쯤인가? 만약 그 "선"(line)이라는 게 있다면 그 라인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하는 것이 필자가 가진 단상의 시발점(始發點)이다.


인간의 탐욕과 그 욕구는 끝없는 것인가? 그 금기를 어긴 대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금기를 깨면서 얻는  쾌감인 "배덕감"이 나중에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죽음'과 맞먹을 만큼의) 호된 대가 보다 더 크고 좋다는 말인가? 인간 스스로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어떤 패러독스(paradox)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유혹도 이겨내지 못할 만큼 나약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말인가? 그 탐욕스러운 욕구를 억제하고 사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이제 여기서 우리는 '메타포'를 떠나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 일상 속에서  "금단의 열매"와 '금기 사항'을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욕구대로 행한 결과와 그 대가가 무엇인지 들려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금기 사항'은 위에서 언급한 특정 종교의 "금단의 열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금지된 사과"가 (더) 맛있다고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많은 예에서 경험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지된 것을 역으로 금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수많은 의지를.



금서(금지된 책. 최고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바로 인기 독서 목록에 올라간다)

금지곡(가장 잘 기억하고 오랫동안 불려진다)

금지된 이데올로기(목숨 걸고 쟁투한다)

금지된 신앙

금지된 사과(선악과(善惡果), 위의 Bible 창세기 참조)

그리고,

금지된 사랑…




강제적인 법과 제도 이외에도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공동체에는 오랜 관습과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한 그 규범에 의한 금기 사항들이 있다. 하지만 그 금기 사항을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시선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그 금기를 깨고자 하는 ("금기는 깨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보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 의지, 또 다른 하나는 깨어지고 있는 금기 사항을 다시 새로이 금기화(禁忌化) 시키려는 인간의 선악에 관한 의지이다.




지금도 "금지된 사과"(선악과)와 "금지된 사랑"앞에 서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다음 [어학사전],

흉흉하다(洶洶--) : 술렁거리어 매우 어수선하다.

배덕감(背德感) : 사회적 금기를 어기거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쾌감.


원죄(原罪) : [기독][천주] 성서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인류 최초의 죄.

금단(禁斷)의 열매 : [기독][천주]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善惡果) 나무의 열매.

인지상정(人之常情)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통의 마음이나 감정.

패러독스(paradox) :

일반적으로는 모순을 야기하지 아니하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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