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생긴 밥차에서 제육덮밥을 판다. 따뜻한 컵밥에 넉넉히 얹어주는 제육볶음의 그 짭조름한 맛에 금방 밥맛이 돋았다. 많이 시장했던 탓에 밥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좀 남은 제육볶음을 그냥 들이켜 마시듯 맛있게 다 먹었다.
며칠 뒤 또 그 밥차를 찾아갔다. 밥 조금만 더 주세요~! 또다시 같은 메뉴로 제육덮밥을 주문할 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컵밥에 밥이 넉넉히 많아 보인다. 아뿔싸! 근데 제육볶음이 확연히 줄었다. 이것이 "컵밥 총량(總量)의 법칙"인가?!
그냥 옳다 그르다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이런저런 극히 주관적 단상이다. 혼자서 '삐딱선'을 타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평소 '행복'이라는 단어에 나름 관심이 지대한 필자로서는 "행복 총량"이라는 말을 듣고 좀 의아했다. 좀 들여다보니, 지금 닥친 불운(不運)만큼 앞으로는 행운(幸運)이 많이 찾아와 줄 거다라는 말로, 나쁜 일 다음엔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독자분들은 이러한 "행복 총량의 법칙"을 믿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이 단지 낙관주의(optimism)나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일환일 뿐이라면 저마다 살아온 인생여정과 지금 처한 삶의 환경에 따라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다고 본다.
지금 닥친 불운만큼 정말 앞으로는 행운이 많이 찾아와 줄지, 나쁜 일 다음엔 꼭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지 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기대'하며 그렇게 되길 믿고 싶을 따름이 아닐까? 스스로에게는 자기 위안(慰安)이 되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쉽게 좌절하지 말고 이 고난(苦難)을 잘 버티고 이겨내라는 덕담(德談)이 되어 용기를 북돋아줄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여러 고난과 문제, 질병,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克服)해 나갈 수 있을까는 별개의 사안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얼마나 행복하려고 이렇게 힘들고 불행하냐, 앞으로는 정말이지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도 (누구에게도) 지금의 불행이 the worst이다라든가 the last one이라고 선뜻 말하진 못한다.(필자가 염세주의자(pessimist)는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금까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별 탈 없이 무난(?)하게 그리고 행복하게만 살아온 사람은 이제 불행할 일만 남았는가?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하면 불안해짐을 느끼는 건가?)
좀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만약 어느 누군가가 한 가지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건 서툴고 못할 것이라고 보는 "능력 총량의 법칙" 같은 섣부른 선입견을 가져서도 안된다고 본다.
혹자는 어떤 한 분야의 능력은 아주 뛰어나고 다른 분야는 형편없이 부족(?)한 사람을 향해 냉소적으로 "신(神)은 공평하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팔방미인'(八方美人)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그리고 평소 주위에 보면 정말 "다 가진" 사람들도 꽤 많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혹자는 이런 다재다능한 사람을 '돌연변이'(突然變異)라고 부르고 싶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 다시 "신(神)은 불공평하다"며 불평불만을 표할지도 모른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인생 총량"이나 "행복 총량"을 말할 때 흔히 드는 단순한 예가 있다. 자기 일과 사업[커리어]에 크게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면 그 사람은 혹여 가족과 가정에 소홀하거나 건강에 또는 다른 어떤 것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들 말이다.
과연 정말 다 그럴까? 자기 일과 사업[커리어]에도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 중에도 "가족과 가정에 소홀하거나 건강에 또는 다른 어떤 것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부지기수(不知其數)로 있을 테니 말이다.
흔히 잘 알려진 '에너지 총량의 법칙'을 단지 "선택과 집중"을 위한 응용(應用)이 아니라 우리 인생사에 어떤 불확실한 기대 속 "행복 총량의 법칙" 같은 비유(比喩)로 인위적으로 치환(置換)시키고자 만 한다면 이는 논리의 비약(飛躍)을 넘어 어쩌면 어불성설(語不成說)에 가까운 무모한 대입(代入)일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에게는 평생 겪을 수 있는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도 뭐든지 다 총량(總量)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행복 총량의 법칙"을 말할 때는 보다 전향적(前向的)인 자세로 '수동적 기대'의 프레임보다는 '능동적(能動的) 개입'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컵밥에 담아주는 밥차 주인의 "컵밥 총량"처럼 과연 그렇게 구성되고 배분될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또다시 여전히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라고 말하며 계속 어떤 "희망 고문"만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또 지금 우리 고통의 "총량"(總量)이 변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행복의 양'을 적극적으로 늘리자는 '능동적 개입'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삐딱선(--線) : 무언가가 못마땅하여 말이나 행동 따위가 비뚤어져 있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팔방미인(八方美人) : 1. 여러 가지 일에 능숙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다음 [어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