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now or never.
독일 TV 프로그램 중에 <Jetzt oder nie> (Now or never)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스페셜 프로젝트로 "지금 안 하면 언제 또 할 수 있겠냐!"라는 취지의 슬로건(slogan)으로 어느 마을이나 단체 등에 꼭 필요한 숙원(宿願)사안, 또는 미루어 오거나 미결로 남아 있는 개인사안 같은 것을 함께 해결해 가며 그 동기(動機)부터 완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어느 시골마을에 어린 학생들이 축구 경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동네 축구장이 없어서 (축구장을 만들 재정적 형편이 안되어서) 고심하고 있던 차에 (작업 차량과 장비를 동원하고 축구장용 잔디를 트럭에 싣고) 이 마을을 찾아가 축구장을 직접 만들어주는 식이다. 어떤 이벤트를 통해 한 마을이나 단체, 혹은 개인의 오래된 숙원사안 등을 함께 풀어간다.
그 축구장과 같은 공사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일손을 모아 일하며, 또 도움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제작진 측과 같이 숙원사안을 해결해 가면서 다 같이 크게 외치는 구호가 있는데 바로, "Jetzt oder nie!"(Now or never)이다.
우리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지금 안 하면 언제 또 할 수 있겠냐라고 보이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지금은 좀 바쁘고 여유가 없으니 할 수 없거나 못한다고 여기게 되어 미루고 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좀 덜 바쁘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그때 그 미루고 미루어온 일을 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매우 제한된 시간 동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끔씩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자신만은 아주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든지. 어쩌면 그래서 인간에겐 내세(來世)가 더더욱 필요한지도 모른다. 미루다가 바빠서 못한 일들을 그 내세에서라도 꼭 해내기 위해서.
어쨌든 지금 못하는 일은, 하지 않는 일은 대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못하거나 하지 않을 가능이 높다고 주장하는, 또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시간이 많이 지난 후 과거의 그 똑같은 일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과거와 똑같은 의지나 동기부여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어서 이다.
미루어 온 그 대상인, 그 일은 변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 일을 대하는 나 자신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더 이상 '과거의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의 모습, 나의 가치관, 나의 절실한 관심사 등은 살아오면서 모두 조금씩 (또는 크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혹자는 지금이라도 과거에 하고자 했던 그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항변(抗辯)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라는 사람이 '과거의 나'로 살 수 있을까? 단지 그때 못하거나 안 한 것을 하고자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로 ("자기 최면"이라도 걸듯이)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나의 참모습이고 진정한 나의 행동이 될 수 있을까? 사실은 매 순간 오롯이 '지금의 나'로 살아야 내가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것이 아닐까?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보면, 우리 중 거의 대부분(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은 나중에 돈 많이 벌고 경제적 여유가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 마치고, 자녀들 다 키워놓고, 말 못 할 가족사를 다 해결하고 나면 “나중에” 그때 가서 하고 싶었던 공부도 다시 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나중에 여유가 있으면 그때 가서 책도 좀 많이 읽고, 글도 좀 쓰고, 책도 펴내고, 하고 싶은 여행도 좀 하려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그 "나중에는" 실행하기가 어렵게 되고 만다.
우리가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못하는 이유 중 가장 직접적인 것으로는, 대부분 그때(나중에)가 되면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순위가 달라지거나 예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꼭 해야 하는,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도 (그러니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인) 나중에는 더 이상 나에겐 중요하지도 않고 꼭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또는 하려고 해도 그 일을 못할 정도로 (불행하게도) 이미 노쇠(老衰)해졌거나 심하게 병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나중에'라는 "미래"가 "지금의 현재"가 되고 나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국(終局)에는 과거 그때의 계획, 의도와 의중(意中)이 옳은 것이었는지 조차도 스스로 다시 자문(自問)하게 되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인 "그때의 미래"가 "지금의 현재"가 된 이 시점에 내가 가진 의지도 여전히 불변하고 그대로인지 스스로도 의문스러운 처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의 나의 모습으로, 과거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현재를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초지일관(初志一貫) 산다는 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을 시간이 지나가면서 (본의든 본의 아니든) 하나 둘 버리거나 단절하게 된다. 그 과거의 하고자 했던 일은 변하지 않았더라도 그 많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우리가 변화했으므로 (또한 그동안 스스로의 변화에 새롭게 적응(?)하면서 살아왔으므로)
우리는 지금 해야 할 어떤 일을 미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중에서 연락해서 만나야 할 사람, 한 번 찾아가 방문해야 할 곳이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일도 마냥 미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지금 안 만나고 나중에 만나려 하면 그 사람이 그때(그 나중에)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그 사람이 나에게 아주 소중한 가족이고 친구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우리가 지금 못 만나고 안 만난 것을 나중에 더 크게 후회하고 아쉬워하며 가슴 아파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누가 옆에서 귀에 대고 큰소리로 Now or never이라고, "지금 안 하면 언제 또 할 수 있겠냐!"라고 꼭 외쳐줘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일을, 그 만남을 이제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는 간절한 이유를.
다음 [어학사전],
십시일반(十匙一飯) :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밥을 보태면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양식이 된다는 뜻으로, 여럿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쯤은 도와주기 쉽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내세(來世) :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 살게 된다는 미래의 세상.
초지일관(初志一貫) : 처음에 세운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