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To our friend Massimo"를 기억하며
이번 글에선 의사소통(意思疏通)에 관하여 떠오른 짧은 단상(斷想) 몇 가지를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해 두고자 한다.
애완(반려)견이나 애완(반려)묘를 키우는 분들에게 평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과연 반려(애완)동물과 사람 간 의사소통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서로 어느 정도까지 '교감'과 '의사소통'이 가능한가였다. 필자 개인적으로 그냥 전해 들은 바로는 최소한 기본적 욕구(좋아하거나 싫어함, 허기, 갈증, 배설, 수면 등)는 거의 다, 그러니까 강아지 주인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물론 그 강아지는 어쩌면 좀 다르게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키우고 돌보는 애완(반려)견이 정확히 뭘 원하고 싫어하는지 그 의사(意思)를 대부분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혹시 동물 입장에선 반복된 훈련에 의한 학습효과의 결과로 심지어 본능과 본성을 거스르는 행태(자유 부재하에 강요된 복종)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도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이러한 궁금증과 관련된 최근까지의 실제 학계의 연구성과가 어떠한지 등, 보다 정확한 것은 생물학(biology)이나 동물학(zoology), 동물행동학(ethology)에 관한 전문가에게 맡겨야겠지만 대체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 높은 의사소통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동물과의 의사소통에 비해 그러면 사람인 우리는 사람끼리 사는 일상 사회생활 중 상대방의 이야기를, 서로 하고자 하는 말의 의중(意中)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잘, 그리고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는가? (빈말, 체면치레 언행, 그리고 겸손이나 예의상 좀 돌려 말하는 것 포함하여) 흔히 이야기하는 "온도 차"가 있다는 말은 말을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간 이해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때도 적용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심각하게 말했는데 받아들이는 상대방은 그게 뭐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인과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좀 다른 차원이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하며 미세한 감정과 그 뉘앙스를 (외국어) 단어 하나하나에 정교하게 담아내며 의사소통하기란 (좀 유창한 사람도 말할 때마다 어떤 단어를 적절하게 선택할 것인가 매번 바짝 신경 쓰지 않으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외국어를 배우는 입장이 되면 항상 좀 긴장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좀 더 겸허한 모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문제는 똑같은 모국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백 퍼센트 다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는 사실이다. 같은 나라에서 자라고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사람마다, 또 연령이나 세대에 따라 생각하는, 말하고자 하는 "언외(言外)의 의미"(connotation)나 단어의 함축된 의미인 함의(含意 implication)가 듣는 상대방에게는 좀 다르게 전달되거나 또는 충분한 이해 내지 납득(納得)이 안 될 수도 있다.
각자가 가진 언어(단어)의 세세한 감각과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서로의 차이가 아예 제대로 파악조차 안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말로나 글로 어떤 대화를 주고받으며 "같은 단어"를 서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그 선택한 단어에 대하여 갖고 있는 (그 단어를 대하며 느끼고 해석하는) "언어감각"이 각자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상의 혼돈을 피하려면 우리는 더욱더 말하고 있는 그 상대방 사람의 언어로 말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는 세대차이가 느껴질수록 심한 것 같다. MZ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옷차림 같은 패션이 아니라 제일 먼저 그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MZ 언어",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들의 언어"로 대화도 하고 진정한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회성과 역사성, 시의성(時宜性 timeliness) 등을 학문적으로 상세하게 분석해 들어가지 않더라도 똑같은 단어가 예전 문화 속에 트렌디(trendy)한 의미에서 지금은 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또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원래의 의미가 좀 퇴색되거나 다른 연관어 조합으로 본질이 희석된 단어들도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언어와 말에 있어 세대차이를 넘어서는 오픈 마인드(open-mind)로 전향적 자세를 갖고 폭넓은 의사소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이해 못 하거나 오해하는 것은 (지난번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확증편향(確證偏向)도 있지만, 무엇을 듣든 편리하게 자기 입장과 관점만으로 심지어 재가공(再加工)하고 각색(脚色)까지 해서 듣기 때문인 것 같다. 이 글의 초고 착상(着想)에 영감을 준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나의 기존 관념과 선입관을 완전히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상대방과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부모나 가족의 영향이든, 교육을 통해서든, 아니면 사회생활 속 자신만의 쌓인 경험치에 의해서든 자신도 모르게 어떤 고정관념과 선입관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일방적 "색안경"같은 선입관은 사람을 새로 알아가거나 새로운 사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때도 수용과 이해의 폭을 좁게 하고 오히려 배척과 편견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다. 위에 언급한 확증편향(確證偏向)도 그런 과정 속에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늘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큰 어려움 중 하나는 누구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다. 바로 이 의사소통이 안되면 갈등과 반목(反目)만 생긴다. 소통이 잘 되려면 우선 상대방 말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저마다 자기 말만 목소리 높여 말하고 만다.
상대방 말을 변하지 않은 본바탕대로 고스란히, 온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을 하나 꼽아보라면 (참고로, '이해'한다는 것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동의와 거부 의사를 표하기 전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본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 Put yourself in another's shoes )가 아닐까 한다. 진정한 의사소통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상대방의 관점에 서서,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이입과 공감(empathy) 하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최근에 한 편의 멋진 시(詩)를 읽었다. 여기서 그 시를 평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필자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필자 나름대로 느낀 감상으론 그 기발한 (상대방의 입장과 관점에서 보는)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해학(諧謔)과 풍자(諷刺)가 시 전체에 물씬 풍겨나 학교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遜色)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詩)와, 또 시인과 '의사소통'한다라고 할 때 시인이 쓴 시를 독자분들은 (시를 읽는 독자 입장에서) 백 퍼센트 다 이해한다고 장담하실 수 있는가? 시를 구성한 시어(詩語)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의 전체적인 의도와 메타포(metaphor), 행간을 포함한 모든 메시지들 말이다. 시를 읽다 보면 시작(詩作)의 근간이자 주된 분위기인 시인의 시흥(詩興)과 감성을 제대로 다 알아차리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시(詩)는 쓰기도 어렵고 해석하기도 어렵고 시(詩)와 같은 창작품과 "의사소통"하기는 더욱더 어려운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시 작품도 버릇처럼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성과 그런 습관적 편견과 선입관으로 자기만의 해석을 시도하는지도 모른다. 시를 읽고 꼭 뭐라 작위적(作爲的)으로 해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그 시 전체에서 풍기는 향기만 맡아도 충분하다는 말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대목에서 필자의 어설픈 시(詩) 감상에 위안을 주는 인상 깊은 *문구(文句)가 있어 아래에 옮겨 적으며 짧은 글을 이만 마친다.
"시란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일 포스티노(Il Postino)>(the postman 1994)中. 감독: 마이클 래드포드, 출연: 필립 느와레(파블로 네루다), 마시모 트로이시 Massimo Troisi(마리오 루뽈로).
원작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El Cartero de Neruda) by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이미 많은 독자분들이 다들 잘 아시겠지만, 시(詩)를 이야기하면 으레 떠오르는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명대사를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서술한 오늘의 화두와 이 인용의 패러독스(paradox)가 주는 혼돈(?)을 곱씹어보며...
다음 [어학사전],
의사소통(意思疏通) :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
connotation(함축된 의미) :
1. 의미 2. 함축 3. 느낌 4. 이미지
(종종 connotations로 단수 취급) 언외의 의미, 함축; (단어의) 제2의 적(第二義的)[정적(情的)] 의미(예를 들면 book이 내포한 「지성, 지식」 등의 의미).
2. [논리학] 내포(內包). (cf. denotation : 1. 명시적 의미 2. 표시 3. 지시)
함의(含意) : 말이나 글 따위에 여러 뜻이 담겨 있음.
시의성(時宜性) : 당시의 상황이나 사정과 딱 들어맞는 성질.
확증편향(確證偏向) :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
역지사지(易地思之) : 1. 남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 2.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다.
착상(着想) : 1. 어떤 일이나 작품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나 구상이 머리에 떠오름.
해학(諧謔) : 세상사나 인간의 결함에 대한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말이나 행동.
풍자(諷刺) : 문학 작품 따위에서,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나 인간들의 결점, 모순 등을 빗대어 비웃으면서 비판함.
시흥(詩興) : 시로 인해 생기는 흥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