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Happy Letter Oct 27. 2023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브런치 글쓰기(18)- 시(詩)와 에세이(essay) 잘 쓰기 위한 단상


어떤 글의 제목 선정을 고민하다가 문득 예전 학창 시절 국어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떠올랐다. 시(詩) 제목으로 어떤 단어 하나만 정해둔 후 시 본문에는 제목에 정한 그 단어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시를 지어보라고 하신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이별>이라는 시 제목을 정했다면, 시를 써 내려가며 시 본문에는 "이별"이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시를 짓고, 또 나중에 시를 읽는 독자가, "이 시(詩)는 '이별'에 대해 쓴 시(詩)구나"라고 느끼게끔 만들어 보라는 과제였다. (물론 모든 시를 이런 식으로만 지어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시 짓기 연습 차원의 과제였다.)


또 역으로는, 제목 없이 완성된 시(詩)가 전달하는 (시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나 분위기만으로 어떤 테마를 전하고 있는지를 압축적인 단어 하나로 만들어 (물론 그 단어는 시 본문에는 사용되지 않은 단어로 선정하여) 그 완성된 시의 제목으로 정해 보는 연습도 있었다.


시인의 창의적 시상(詩想)을 시로 구현하는 데는 '시적 표현'이라는 (시적 예외로 통상적 문법을 초월하는 표현인) 시어(詩語), 시적 운율, 시적 화자, 메타포(metaphor), 압축성 등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압축적인 의미와 메시지 전달 요소를 고려해 보면 필자가 최근까지 발행한 창작시 12편은 참 부끄럽기 그지없다.


앞서 발행한 글, ["초록색 신호등"에 관하여]는 처음 시상(詩想)이 떠올랐을 때 창작시로 발행하려고 만지작 거리든 단상이었는데, 도저히 압축성 있는 글이 나오질 않아 "산문처럼 보이는" 산문시(prose poem)로도 써볼까도 고심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이도저도 아닌 아주 어정쩡한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그냥 다 드러나고 마는 긴장감 없이 늘어진 글이 되어 버려 에세이 형식으로 다시 고쳐 보려고 애써다가 스스로 "항복"하고 말았다.


그 글의 모티브(motive)나, 아이디어와 메시지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듯한, 어쩌면 좀 진부한 느낌까지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필자가 실제 목격한 그 상황에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이었으며 - 꼭 신선한 시상(詩想)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 글로 한번 표현하고 싶었다.


글 발행 후 이렇게 (이례적으로) 바로 앞선 글에 대한 감상을 좀 장황하게 적는 이유는, 최근에 읽은 몇 편의 시에서 멋진 시(詩)란 과연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면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가 주는 압축성과 강하고도 분명한 메시지, 그리고 그 시어(詩語)가 가지는 메타포 등 모두 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인상 깊은 시였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창작시 발행은 당분간 공부와 연습을 좀 더 하고 나서 다시 시도해 보려고 한다.


여담이지만, 직장생활 좀 하다 보니 모호한 간접 표현, 비유와 상징에 의한 추상적 압축은 어떻게 보면 배척(排斥) 요소이고 오히려 직관적이고 직설적인 문법과 표현으로, 그리고 메시지를 시각화시켜 '분명히' 서술해야만 한다는 (직업병 같은) 강박이 좀 있는 것 같다. (이런 말도 실은 시 쓰다가 현타온 필자의 소심한 자기변명인지도 모른다.)




이런 자기변명의 현실적 근거와 그 결과로 현재 필자의 글쓰기 주된 분야는 "에세이류"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 글쓰기로 인한 즐거움과 글쓰기로 인한 스트레스(피로감) 사이에 적절한 밸런스를 찾지 못할까 봐 유달리 걱정이었다. 필자에게 글쓰기로 인한 스트레스는 조회수나 구독자 수 증가를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분은 앞선 글들에서도 밝혔지만 이제 초연해지자고 "자기 최면"을 많이 걸고 실제로도 좀 초월한 듯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쓰는 글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때 가장 아쉬움이 크다. 대부분의 글이 만족스럽게 발행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발행하려는 글에 불필요한 미사여구가 많이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스스로도 자주 되뇐다. 예전 학창 시절에 영미권 책을 번역한 번역소설을 읽다 보면 형용사와 부사가 엄청 많고 마침표 나올 때까지 한 문장이 너무 길어 당황한 적이 많았던 기억이 있어서다. 영어공부 삼아 영어 원서를 찾아봐도 실제 좀 길다고 생각될 정도로 긴 문장들이 많은 책들을 보게 된다.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과거 한때 영미권에서는 소설책 출간이나 원고료를 계산할 때 글 속에 쓰인 단어수를 일일이 다 카운트해서 지불해 주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경제적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가난한 전업작가들은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어야 하다 보니 소설 스토리 전개 하나에도 필요한 문장들을 최대한 길게 늘여 쓰게 되었고 각종 심리나 상황, 사건의 전개 과정 등을 아주 세세하게 묘사하고 또 설명에 설명을 덧붙이며 단어수를 추가하고 늘렸다고 한다.


그러나 보니 그 또한 하나의 '만연체' 같은 그 작가의 문체가 되었고 또 국문 번역본도(번역하시는 분도 고생하셨겠지만) 그만큼 가독성이 떨어져 읽기 어렵고 산만하게 보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번역소설들을 우리는 학창 시절에 많이 읽으며 자랐고. 그래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만연체'에 익숙한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어떤 창작글을 쓸 때 쓸데없이 또는 지나치게 '만연체' 톤이 되는 것을 경계하려 한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비단 '만연체'로 쓰느냐, '간결체'로 쓰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현학적 표현이나 연관 배경을 어떻게 어느 정도 함께 써나갈 것이냐도 고민이다. 이 부분은 인기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글을 많이 읽어서 좀 따라 하게 되는 것 같다. 에세이 같은 글을 써다 보면 '평면적'이 아니라 좀 "입체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뇌리(腦裏)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요즘 트렌드(trend)는 '융복합'의 시대가 아닌가. 2가지 이상의 분야를 말 그대로 융합과 복합을 통해 더 다양한 연구와 분석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폭넓은 배경과 좀 다양한 연관 사례와 에피소드를 글 중간중간에 삽입하려다 보니 욕심이 과하거나 해서 정작 글 주제 자체가 산만해지고 포커스(focus)를 잃어가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퇴고하면서 글을 매만지다가 글이 "산으로" 갈까 봐 더 이상 수정(또는 부연이나 첨언)하는 것을 멈추고 그냥 발행하고 말 때도 있다. 쓰던 글의 중심 주제에 따른 문장 및 논조의 흐름이 일관성을 갖게 이어주는 [Roter Faden](독어."빨간 실") 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오히려 최종 퇴고 때 필자는 다 쓴 에세이 글 중 맥락을 흩트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중복된 문장이나 단락을 빼려고(삭제하려) 애쓰는 편이다. (하지만 마음만큼 잘 안된다.)


좀 더 밀도 있고 긴장감 있는 에세이 글을 원한다면 함의를 담은 압축적 표현으로 써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처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부 시적 기법을 차용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각 장르에 따라, 글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각자 자신의 글의 문체가 (각각의 개별 장르 속에서) 어떠한지도 스스로 한 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생활 수필 같은 산문, 에세이류를 주로 쓰는 분들은 가끔씩 창작시를 써보면 글의 탄력성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최근에 몇몇 글들은 쓰고 발행하는 과정 중 다루는 주제 때문에 좀 힘들었다. 예를 들면, 피할 수 없는 반복적 유혹인 "철학책 펴기"와 또 그렇기 때문에 거의 필연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철학색 덮기"를 다룬 글, 그리고 또 결코 쉽지 않은 주제인  "권력"이나 "표절" 그리고 "폭력"에 관하여 쓴 글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모두 어렵고 예민한 주제여서 고심이 많았고 또 길게 쓰기에는 벅찼다. 이런 분야의 주제들은 아마도 필자가 경험이나 지식이 변변찮기 때문이거나 또는 아직 일체화되지 못한, 그러니까 완전히 체화(體化)되지 못한 (생각이나 경험이 완전히 성숙되거나 자기화되지 않은 상태인) 분야여서 일수도 있다. 어떤 인생경험들은 직접 당사자가 되어보거나 하지 않으면 체감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은 것 같다. 아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우리가 따라 움직이지는 않으면서 그저 가만히 앉은 상태로 책만으로 춤을 배울 수 없듯이. 애틋한 사랑을 잃은 실연(失戀)의 쓰디쓴 아픔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건이 되는 한 어떤 토픽이든 가능하면 자주 글로 써보려고 한다. 필자가 조회수나 구독자 수를 초월하여 글을 쓰고 발행할 수 있기 위해 마인드셋(mindset)을 아예 바꾸기로 했다. 필자 자신만의 만트라(mantra)는 아래와 같다.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글을 쓰고 발행할 수 있다."


발행한 글을 가장 먼저 읽지는 않더라도 묵묵히 마지막 문구(文句)까지 끝까지 읽어주시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필자의 글은 충분히 그 발행의 의미를 가질 것이리라 본다. 지금 심경으로는 혹시 아무도 안 읽는 글이 된다 하더라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필자 스스로가 글을 읽는 "독자"로도 계속 함께 갈 테니까.








지금까지 150여 편의 글을 쓰고 발행한, '자기 다짐' 같은 소회를 두서없이 좀 적어 보았습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필자의 글을 관심 갖고 꾸준히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모두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가지만 선택한다는 게 다른 것을 포기하는 아픔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