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글쓰기(37)
최근까지 여기 브런치스토리에 2백여 편의 시(詩)를 발행한 소회(所懷)를 한번 적어두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필자 자신을 위한 글이지만 글쓰기를 이제 막 시작하신 작가분이나 또는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하여 고민 중이신 분이 지나시다가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다면 혹시 조금이라도 공감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냥 거의 매일 글을 발행하면서 느낀 필자의 개인적인 짧은 소감 두 가지 정도로 봐주시면 될 것 같다. 여기 브런치에 여러 이웃 작가님들의 글을 기웃거리며 읽다 보면 발행글이 1k+ 넘는 작가분들도 다수 있어 내심 좀 놀랐다. (여러 관점과 견해가 분분하겠지만 '다작'(多作)이 좋다, 그렇지 않다 여부의 논의는 일단 뒤로 좀 미뤄두고 보자.)
제일 먼저, 필자는 시(詩)라는 장르에 "도전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때로는 실험정신으로, 때로는 일시적 '도피처'로 - 시를 쓰고 발행하면서 - 지금까지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진부한 키치[Kitsch]와 클리셰[cliché]라고 할지라도 일상 속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 동원해 가며 시(詩)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여러 글들을 발행한 후 한참 뒤에 그 글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면 간혹 흐뭇하다가도 너무 부끄럽고 낯간지러워 스스로도 마주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MZ세대 말 그대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상황을 참고 견디는 힘'이라는 "항마력"(降魔力) 테스트를 당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이 신조어와 관련하여 필자의 졸고, ["항마력"(降魔力), 이게 무슨 말인가요?]를 참조하시기 바람)
하지만 멋지고 폼나게 배를 위로 누운 자세로 두 팔을 번갈아 뒤로 저어 나아가는 방식의 '배영'(backstroke)이나, 또는 두 손을 동시에 앞으로 뻗어 물살을 저어 나아가는 방식의 '접영'(butterfly stroke) 등의 고도의 스킬을 요하는 수영보다는 필자에겐 우선 "물에 뜨는" 것이 제일 급선무였으며 그렇게 물에 잠시라도 혼자 떠 있을 수 있길 바랐다.
어쨌든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이라고 해서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시(詩)의 모티프[motif]로 사용하지 말란 법도 없고 진부하다고 해서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시를 읽을 때 감흥이 없거나 시에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 테마나 소재가 진부해서가 아니라 시인의 미숙(未熟)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세련되지 못하다거나 기발 내지는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비평은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여기서 독창성 여부는 필자 자신에게도 아직도 늘 '물음표'다.
하지만 누구나 언필칭(言必稱) 독창적인 '예술적 상상력'을 운운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개개인의 경험과 테두리에 우리를 가둬두는 세태도 어떤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는 때때로 소재의 빈곤보다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더 고심에 빠지며, 더욱이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새로운 관점의 결핍(缺乏)은 글쓰기에 있어 (상상력의 빈곤보다도 더) 가히 치명적이다고 본다.
필자가 직면한 문제는 발행한 글을 다시 읽어보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글을 쓰면서 수차례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며 익숙해져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피어오르는 어떤 "기시감"(旣視感)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지나친 강박? 글쎄, 그렇게 물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무릇 타인 표절뿐만 아니라 '자기 표절'도 엄연히 표절이기에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물음과 의심을 반복하고 있는 나는 이 묘한 '느낌'으로부터 언제쯤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필자는 이 이슈와 테마로 이미 앞서 몇 편의 에세이와 아래와 같은 시를 발행한 적도 있다.)
두 번째는, 버리는 것의 어려움에 관한 심란함이다. 가끔씩 TV를 보다 보면 도예(陶藝) 하시는 분이 정성스레 도자기를 빚고 또 뜨거운 가마불에 구워내는 과정을 보면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워 보였다. 그 수많은 수작업과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얻어내는 결과물인 예술 작품[도자기]은 더더욱 경탄을 자아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다 구운 그 도자기[예술 작품]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망치로 내리쳐 한 방에 깨부수어 버리는 것은 도저히 따라 할 엄두가 안 난다.
나도 그 도예가(陶藝家)가 도자기를 빚듯 시를 짓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한 방에 깨부수어 버리지" 못했고 덧칠을 하며 사족(蛇足)을 달았고 또 그로 인해 또다시 심란해지곤 했다. 나는 과연 언제쯤 불완전한,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시를 과감히 갈아엎어버리고 또 미련 없이 내버릴 수 있을까?
비록 '고급' 도자기를 빚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좋은 날 좋은 시(時)에 허기에 찬 배고픔 달래줄 식사자리 밑반찬 하나 놓을 울퉁불퉁 투박한 '질그릇'이 되어도 좋다. 관상용(觀賞用) 예술 작품도 다 그 의의가 있겠지만 - 금방 보고 잊힌다 하더라도 - 단 한번 한 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시를 짓고 싶다.
매일 시(詩)를 짓는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그 도자기 몇 개를 스스로 깨트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를 짓는 시간은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고 고된 인고(忍苦)의 시간이다. 무엇이 여물어가고 익어가고 구워지고 숙성(熟成)해 가는 과정이 그러하듯.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했듯 아직도 나는 내가 오랜 시간 고심하며 빚고 구워낸 '도자기'를 스스로 "깰" 용기가 없다. 어쩌면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새롭게 만들어지고 탄생(誕生)하는 모든 창작품은 - 단지 탄생되는 것과 탄생시키는 것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 나름대로 다 그 의미가 있으리라고 필자는 믿는다.
예술 작품의 창조와 탄생은 문득 떠오른 생각이든 오랫동안 고뇌하며 끌어낸 장고(長考)의 노력이든, 어떤 작품의 '시상'(詩想)을 떠올리는 (작품의 단초를 잉태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또 내 마음에 품고 있는 단상(斷想) 하나하나가 이미 소중하게 열매 맺을 그 결실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 '생각'의 끊임없는 지속(持續)뿐인 것 같다.
이 비 그치고 나면 그 텅 빈 놀이터를 다시 찾아가 보려 한다. 흔들리는 그네 따라 흔들리며 내 몸도 내 심란한 생각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로 맡겨 보련다. 아마도 언젠가는 멈출 때도 오겠지. 그네에 고인 물도 다 말라 버리고 그 낙엽도 바람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으면 좋으련만.
강박(强迫)1 : [심리] 불합리하다고 자각(自覺)하면서 어떤 관념이나 행위에 사로잡혀 억제할 수 없는 일. (다음 [어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