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 모임에 참석했다가 식사를 한 후 이어서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이런저런 여러 이야기들로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웃음꽃을 피우며 한참 수다를 떨다가 참석자 중 누군가가 불쑥 “이런 모임을 통해 서로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어 너무 좋다”며 흐뭇한 얼굴로 한껏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때 그냥 덕담(德談)이겠거니 하고 넘어가지 않고 다른 한 명이 굳이 바로 토를 달며 나섰다. 평소 자주 만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 몇 명의 “평균치”가 바로 자신의 현재 ‘수준’이다며. 순간 몇몇은 당황한 기색이 역역한 채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고 그 자리의 분위기(어쩔?)는 갑자기 좀 썰렁하다 못해 어찌 화기“애매”하게 되고 말았다.
이제 점차 인생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져 갈 날이 머지않은 필자도 그 지인이 말하고자 하는 저의(底意)를 곱씹어 보게 되었다. 일상 속 사회생활하면서 인간관계나 친목 모임도 학교 시험성적이나 “반평균점수”처럼 일일이 다 계산을 해야 하는 것일까? 또 그런 계산이라는 것이 당최 가능하기는 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어릴 때부터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누구는 친구 잘못 만나 걔 인생이 어찌어찌 되었다는 그런 경계(警戒)의 말들은 수도 없이 많이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필자는 사회생활하면서 내가 내 주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거나 그 무리들(모임) 속에서 “평균점수”를 깎아먹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만큼 선하거나 잘 났다는 뜻이 아니라 친구나 지인들 모임에서 그런 의문 자체를 아예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붉은 기운을 가까이하면 붉어진다”는 “근묵자흑 근주자적”처럼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가 그 사람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선한 영향력을 더 주거나 키우기 위해 애쓰는 대신에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그런 “평균치”에 대한 의심과 계산만 - 혹은 어쩌면 내심 어떤 상향 기대(?)만 - 먼저 앞세운다면, 또한 그렇게 무턱대고 어떤 편협한 잣대로만 차별한다면 우리 사회는 저마다 끼리끼리(우리끼리)만 모이는 “폐쇄 사회(closed society)”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저마다 사람을 가려가며 만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다. 어쩌면 요즘처럼 복잡 다양한 사회생활 속에서 예기치 않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소를 줄이고 또 그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도 더 철저히 가려가며 만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계”(警戒)의 미명(美名)하에 자칫 잘못하여 어떤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되거나 카르텔(cartel)과 같은 사회적 병폐(病弊)로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고 본다.
다시 글 서두에 언급한 에피소드로 돌아와 보면, 그때 그 “평균치”라는 말을 한 지인이 어떤 저의(底意)를 가지고 (그리고 도대체 어떤 조건과 잣대로) “평균”운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는 내심 나를 과연 그 모임의 구성원으로 자랑스러워했을까, 아니면 좀 부끄러워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당혹스러워졌다.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내 주위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고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또 역으로 나는 그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저의(底意) :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품은 생각.
근묵자흑(近墨者黑) :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쁜 버릇에 물들게 됨을 이르는 말.
근주자적(近朱者赤) : 붉은빛에 가까이 하면 붉게 된다는 뜻으로 주위 환경이 중요하다는 의미.(Daum [어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