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박완서 산문집 10 (2025)
독후감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서평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박완서 산문집 10. 문학동네. 2025)을 읽으면서 단지 말 그대로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이야기, 그런 에피소드(episode)만을 탐독(耽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다양한 여행담을 통해 - 필자 개인적으로는 - 작가의 폭넓은 사유와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책이었기에 모처럼 그냥 짧게나마 독서노트로 적어둔다.
항간에 농구 스킬을 무엇에 빗대어 우스개처럼 "오른손은 거들뿐"이라고 말하던데, 필자의 눈엔 작가의 여행지와 체험한 소재는 그냥 "거들뿐" 실질적인 여행자의 감상(感想)은 그의 "내 나름대로 누릴 수 있는" 사유와 감정에서 나오는 것 같다.
낯선 타지나 먼 이국땅의 여행에서 경험하는,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어쩌면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긴장감을 애써 제 발로 찾아가는 "고된" 여행은 그래서 길을 나선 여행자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나중에 여행후일담을 듣고 읽는 독자들에게까지도 설렘을 준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 작가의 책,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기행문임은 맞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우리가 어디를 갔고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맛있게 먹었다는 식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혹은 언제 보았거나 들었음직한) "정지된" 사진 같은 나열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의 여행 산문은 화려한 미사여구(美辭麗句)나 압축된 추상화도 없이 일상적일 수 있는 여행(지)이라는 소재를 한 편의 소설 같은 - 감흥과 감동을 자극하는 - '드라마'로 재탄생시키고 있는 듯하다. (글 중간중간 평소 그가 소설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제로 어떤 이야깃거리의 주제나 소재를 어떻게 구해 모으고 작업하는지 밝히는 부분은 필자에게 무척 흥미로웠다.) 여담이지만 - 필자는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 그의 (등장인물들) 실명토크가 그 여행기를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것 같다.
필자가 주목하는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필이 꽂힌) 것은 작가가 언급하는 우리의 '감정'에 관한 구절이었다. 여행자로서의 감정도 있겠지만 광의적인 의미로 평소 일상의 삶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꿈을 꾸기 위해선 먼저 감정이 독자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31쪽)
여기서 어떤 스포일러를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다. 부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 스포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 조금 더 들여다보자면 위 말의 앞뒤 문맥은 다음과 같다.
꿈을 꿀 수 있는 한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 만일 그런 꿈도 없다면 무슨 맛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쓰고 남는 건 저축도 하고 최소한의 경제생활이나마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꿈을 꾸기 위해선 먼저 감정이 독자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꿈처럼 독창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내 나름으로 누리는 기쁨] 中 30-31쪽)
어떤 여행도, 그 낯선 체험과 현상을 대할 때도, 혹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믿음과 희망을 대할 때도 결국 그 중심엔 자기 자신이, '독자적인 감정'이 자리해야 함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끝으로, 평소 필자도 '꿈'이라든가 '감정'이라는 화두에 관심이 많다. 특히 감정에 관해선 좀 더 생각이 정리되면 따로 글로 한번 써보려 한다. 타인의 감정이라든가 자기 고유의 감정처럼.
간혹 가다 글쓰기가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꺼내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필자처럼 지금 어떤 새로운 여행을 꿈꾸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