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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Happy Letter Aug 02. 2023

우리가 '장례식'에 가야 하는 이유(THL행복론9)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


이번 글은 어쩌면 좀 무거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므로 늘 기억하고자 이렇게 적어본다.


어제오늘 유달리 많이 힘들었거나 최근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기분이 좀 울적한 독자분들은 아래의 글을 읽지 말고 그냥 창을 떠나셔도 된다. 이 글 하나쯤 안 읽었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냥 휴식을 취하거나 차 한 잔 마시며 음악을 들으시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으시는 것도 독자분의 자유다.






앞서 발행한 필자의 짧은 글에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소설, [The Outsider](이방인)을 소개하면서 글 마지막에 그 작가가 46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쓰고 나니 '만감'이 교차한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더 이상 '터부'도 아닌데도. (이 소설의 첫 문장은 "Mother died today."로 시작한다.)


다음 [어학사전], 터부(taboo) :

어떤 사회에서 신성하거나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접근이나 접촉을 금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금하거나 꺼리는 일.





물론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러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부류의 주제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은 가슴 뭉클한 감흥을 주거나 때로는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날 정도로 울컥해지는 감동적인 글만큼이나 읽는 내내 어떤 우울한 '감정 소모' 같은 것이 동반되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필자도 살아오면서 겪어온,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 죽음과 관련된 - 사례를 다시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쉽지만은 않은, 말하자면 또 다른 의미로 '감정 노동' 같은 일이 되어 어깨가 무거워지고 목이 움츠려지며 간혹 나오는 긴 한숨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엔 지듯이, 우리는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 알아야 한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런 얘기를 터부시 하거나 꺼내길 애써 그리고 의식적으로 피한다.


얼마 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 삶의 유일한 '일회성'이 주는 의미는 엄청나다. 그래서 한 번뿐인 인생, 정말 열심히 성실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뜻깊고 재밌게 신나게 즐겁게 살아라고 배웠고 또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 오늘을 살아라 했는데 우리가 맞닥뜨리는 사람들 중에는 모두 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며 사는 부류도 많다.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거나 새로운 삶이 존재하는 가 여부는, 여기서는 일단 "종교의 영역"으로 해두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는 '죽음'을 매일 의식하고 염두하며 사는 것이 이 생의 삶을 더욱 값지고 의미 있게, 활력 있게 사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고. 그래서 오늘 최선을 다해 일하고 즐기고 또 '살아있음'을 마음껏 향유하라고.


다음 [어학사전], 향유(享有) :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여 누림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일로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알 수 없는 - 현대 최첨단 의학조차도 쉽게 치료하지 못하는 - 희귀병에 걸리기도 하고, 또 잘 알려진 병도 어느 날 갑자기 부지불식간 이른 나이에 찾아와 큰 고통을 겪게 되기도 한다.


어떤 병이든 그 병을 치유할 수 없고 그로부터 회복할 수 없다면 그 고통의 끝이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기에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그 '마지막 날'로 인해 더욱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괴로울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죽음을 대하는 어떤 사고방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 같다. 단지 '마지막'이라는, 소멸이나 파멸 같은 부정적 의미나 이미지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죽음도 '삶의 한 일부분'으로 우리 삶이 '완결'되는데 필요 불가분한 것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고 본다.


다음 [어학사전], 불가분(不可分) :

1. 나누려 해도 나눌 수 없음.

2. 나누려고 해도 나눌 수 없는 상태이다.





죽음이 일상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가까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환으로 또는 사고로나 병들어 죽더라도 죽음이 우리 일상 속에 공존할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다가올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도!


무조건 부정적이거나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될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거나 보여서도 안된다. 누구에게는 좀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그 마지막날이 찾아올 뿐이지 누구에게나 '그날'은 온다. 반드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척, 가까운 친구나 지인이 - 병이든, 갑작스러운 사고든, 노환이든 - 세상을 떠나면 견디기 어려운 슬픔, 그런 애통함에 고통스러워한다.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우리 삶이 한없이 무상(無常) 하다고 한탄하게 된다.


다음 [어학사전],

무상(無常) : 1. 모든 것이 아무 보람도 없이 헛되고 덧없음.

한탄(恨歎) :뉘우치는 일이나 원통한 일에 대하여 한숨을 쉬며 탄식함.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로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은 - 무슨 '기억의 망각'이나 '탄력 회복성' 때문만이 아니라 - 바로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죽음' 앞에 그토록 힘들고 슬픈 것은 혼자일 때이다. 혼자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로서 세상에서 제일 괴롭고 힘든 슬픔은, '죽은 자'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을 때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죽은 자를 애도하고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아있는 유족을 위해서 장례식에 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만 먼저 떠난, 그 죽은 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곧 또는 언젠가는 다가올 - 살아남아 있는 자로서 - "나의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다가올 슬픔도, 그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할 때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장례식'에 꼭 가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바빠도, 죽은 자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를 위해서, 그 견디기 어려운 큰 슬픔 앞에 '삶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위안'이 되기 위해, 우리가 -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에도 -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그 장례식에 가야 한다.


어쩌면 그 장례식은 '나를 위한' 장례식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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