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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Happy Letter May 13. 2024

친구(親舊)에 관하여


최근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옛 친구에게 (새로운 연락처를 찾아서라도) 다시 연락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많이 망설인 적이 있었다.


무슨 물질적인 것을 크게 신세 져서 되갚아나가겠다는 결심의 대상은 아니고 또 딱히 뭘 표 나게 빚져서도 아니지만 그냥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처럼 막역(莫逆)했던 사이에 - 예전에 한 때는 거의 매일 연락하며 지내다시피 했었는데 - 서로 이렇게 오래 연락 안 하고 지내도 괜찮은 걸까라는 어떤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좀 나기도 했다.




막연한 내일을 알 수 없어 불안해하던 학창 시절, 그는 필자에게 거의 매일 연락하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지내던 벗이었다.


별다른 놀이가 많이 없었던 그 옛 시절에 둘이서 남은 용돈을 아끼고 보태 한두 시간 탁구를 같이 치거나 테니스장 너머로 테니스 치는 사람들을 구경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이 테니스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상대 플레이어(player)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는 필자에게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이방인>(L’Étranger)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고, 또 아끼는 책이라며 손때 묻은 책,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Demian)을 빌려 준 친구였다.


그 책들을 읽고 교정(校庭)을 같이 걸으며 서로 나눈 이야기들은 지금 잘 기억나지 않지만 꼭꼭 눌러쓴 '손편지'를 주고받던 추억은 아직도 생각난다. 그가 보내준 그때 그 당시의 편지들(예술품)을 지금 보관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편지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나 다름없으니까)


한 때는 마르탱 뒤 가르(Roger Martin du Gard)의 <회색노트>(Le Cahier Gris)를 흉내 내 볼 요량으로 노트를 한 권 사서 한동안 서로 "교환일기"를 같이 써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그 교환(공동) 일기장을 통해 엿보는 것이 너무 가슴 아려 오래 계속 쓰지는 못하고 말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어쩌면 필자는 그 당시 그처럼 솔직하게 속내를 다 드러내며 쓸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의 바람대로 작가가 되었을까? 아니면 사춘기와 갱년기 둘 사이 속 하루하루 어떤 팽팽한 전쟁만 치르고 있을까?




저마다 매일 바쁜 일정이 있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 그 와중에도 꼭 빠질 수 없는 자기만의 데일리 루틴(daily routine)을 지키는 것이 (비록 그 루틴이 또 다른 하나의 "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이라도, 우리에게 심신(心身)을 안정시키는 든든한 피난처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넋두리든, 하소연이든 묵묵히 들어주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질 거야라며 위로해 주고 그래서 다시 숨 쉴 수 있게 힘을 얻게 해주는 '찐친'(진짜 친구)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우리에게 어떤 루틴처럼 가까이 그리고 자주 교류하는 친구란 어쩌면 "전쟁"같은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기댈 수 있는 "피난처" 같은 대상이 아닐까?


하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친구(親舊)를 사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 귀한 만남을 선사해 줄 상대방[친구]이 문제가 아니라 내 허물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지 못하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진정한 친구 사이의 우정(友情)이라면 서로의 장점에 이끌려 사귀다가 단점을 보고 헤어지고 마는 연애(戀愛)와는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돌아서서 내 허물을 흉볼지도 모른다는 불신(不信)만 앞서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냥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도토리 키 재기"하기가 싫어서일까?


동네 주변에 간혹 보면 연세 좀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낯선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잘 걸고 대화를 나누는 건 그냥 정(情)이 많으신 분들인 까닭일까, 아니면 평소 친한 말동무, 그런 친구(親舊)가 많이 없어서일까?




우리가 ‘친구’(親舊)가 되는 지름길은 뭘까? 그 예전에 옛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진짜 친구는 "친구 하자"라는 말을 하지 않고도 같이 지내다 보면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누가 먼저 "우리, 친구 할래?"라고 묻는 그 순간에, "응, 그래!"라고 바로 대답하지 않고 수줍게 웃으며 "난 우린 이미 친구라고 생각했는데!"라고 답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 답을 해 준, 멋진 톤(tone)의 목소리를 가졌던 그 옛 친구가 무척 그립다.













막역하다(莫逆--) : 서로 허물없이 썩 친하다.

도토리 키 재기 : 정도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서로 다툼을 이르는 말.(다음 [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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