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같은 슬픔

아무래 생생해도 그건 참으면 그냥 볼일뿐이라고

by 일구삼

그냥 울어버리는 날들이 있다. 원래 눈물이 많기도 하지만, 생리 때가 되면 여지없이 눈물이 고인다. 모든 여자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난 호르몬의 방문을 극진히 모시는 편이다. 예 오셨습니까 어서 오시지요 제가 서둘러 눈물을 흘릴 테니...


내가 자주 우는 것은 분명 호르몬 때문이지만, 내가 심히 감동적인 스포츠를 좋아한다는 것도 문제다. 몸을 날리는 다이빙 캐치와 역전 홈런, 세이브 투수의 포효 같은 건 너무 극적인 것 아닌가. 또, 경기가 끝나면 얼마나 많은 선수들의 인터뷰가 올라오는지 그걸 하나하나 보다 보면 눈물 찔끔 안 할 수가 없다. *어린 선수에게 등번호를 물려주고 간 사람의 '그건 네가 달아야 할 번호다.' 발언은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부작용을 유발한다. 그 인터뷰를 보고 바로 그 선수의 호수비 장면을 봤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내가 엄마도... 아니고 심지어 그 팀 팬도 아닌데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아주 어린 투수의 '팀을 위해 던지겠다.'는 발언이나 ***우리 팀 슈퍼스타의 "죄송하다."라는 말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팬을 위로한다. 위로를 지나쳐 가슴이 벅차는 사람이 있는 게 문제지만...


별 것 아닌 일에도 이렇게 눈물을 흘릴 때는 심정적으로 매우 힘들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감정은 멀쩡한데 눈물만 나오는 게 아니다. 실제로 많이 슬프기 때문에 별로 정신상태가 좋지 못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호르몬의 영향으로 이렇게 힘들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걸 계속 인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날의 밤엔 '이건 가짜다.'를 수도 없이 염불 한다. 이 감정은 가짜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다 허상이다. 이 눈물도 다 거짓말이야! 하지만 감정이란 건 그 자체로 너무 감정적이고 그걸 실제로 겪는 나도 한껏 취약해져서 불쑥 그렇게 말한다. '어느 가짜가 이렇게 생생한데?' 정말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짜는 가짜다. 인생을 다 갖다 버리고 싶어도 내일이면 후회할 것이다.


그럴 때면 야구 선수들의 참을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타자에겐 특이하게도 '참을성'이 요구된다. 스트라이크처럼 속임수를 쓰는 볼에 배트를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 타자들이 무심코 헛스윙한 그 많은 볼들은 얼마나 진짜 같았을까. 얼마나 생생했을까. 약간 높은 구위 좋은 패스트 볼이나, 휘어져 들어오는 변화구에 얼마나 많이 당했을까. 당하는 그 순간엔 정말 그게 진짜 같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가짜인 걸 알아도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변화구 타이밍인 걸 알아도 눈에 보이면 어쩔 수 없이 배트를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스트라이크 같아도 작은 네모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그건 그냥 볼이다. 저 너머로 날릴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와도, 그건 참으면 그냥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볼일뿐이라고.


아마 한 달에 한 번은 이렇게 못 말릴 정도로 울게 되겠지만, 난 이게 가짜라는 걸 이젠 안다. 내가 언제쯤 참을성 있게 굴게 될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상대전적에서 호르몬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현실이다. 흑흑. 하지만 저 멀리 까마득히 먼 볼에게 헛스윙하던 루키 타자가 이제는 어엿히 성장해 변화구를 참는 것을 난 봤다. 그 선수의 참을성 있는 볼넷을 본 이상 나라고 못할 것은 없다. 나에게도 꽤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




*23년 4월 14일 만루홈런을 때려낸 삼성 라이온즈 이재현 선수의 인터뷰. 전년도 함께 뛰다 이제는 이적한 KT 위즈의 김상수 선수의 7번을 물려받았다.

https://youtu.be/Xa97_QprkpY?t=63


**한화 이글스 문동주 선수가 국내 선수 최초로 160km 구속을 찍고 난 후의 인터뷰. 마지막엔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팀을 위해 던지겠다 말한다.

https://youtube.com/shorts/58aZVDzu8FA?feature=share


***작년 키움 히어로즈가 결국 우승을 하지 못한 직후의 인터뷰.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푸이그는 눈물 보였고, 이정후는 웃으며 다독였다 | 연합뉴스 (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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