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나에게는 눈물 버튼이 몇 개 있다. 어느 날 이 모둠을 언니에게 소개했는데 너무 비웃어서 다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 마음먹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감동적인 것들이라 혹시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다. 그중 가장 강력한 눈물 버튼은 KBO 40주년을 맞아 레전드 4인으로 꼽힌 이승엽 감독의 선수 시절을 다룬 기사다. 기사 마지막 부분에는 은퇴 당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날 경기에 '오기 싫었다'는 그는 마음을 다잡고 호쾌한 스윙을 해냈다. 아주 커다랗고 깨끗한 홈런을 만들어냈다. 은퇴 경기에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라니. 하지만 비단 그것만으로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기사에는 곳곳에 아름다운 문장이 숨어있다. '오기 싫었다.'부터 난 벌써 가슴이 찌르르했는데 그 뒤로 이어지는 '예전처럼 배트를 길게 쥐고 호쾌한 스윙을 해보자.' 하는 다짐이나, '그러니까 이승엽은 떠나는 순간까지, 최고였던 거다.' 하는 찬사는 이승엽을 모르는 사람도 그를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물론 이승엽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난 이승엽의 전성기 시절을 보지 못했다. 근데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타자인지, 그리고 또 얼마나 거대한 장정을 걸어왔는지 전부 느껴졌고, 아닌 밤 중에 유튜브에 이승엽을 오래 검색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실은 글로 적혀짐으로써 더 빛난다. 나에게는 그 은퇴식 홈런이 그랬다. 그 영상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몇 번이나 다시 재생하면서 그 순간 그 스윙의 마음은 무엇일지 짐작해 봤다. 아주 호쾌한 스윙의 마음이. 홀가분했을까, 아니면 스윙하고는 어울리지도 않게 아쉬웠을까. 인생 전부를 차지하던 운동을 그만두는 날의 마음에는 비할바가 못되지만..., 나도 학교를 떠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문사를 떠날 때. 열심히 기사를 쓰고 읽었는데 그걸 다 내려놓을 때. 우리 학교 신문사는 한 학기에 4번의 신문을 발행해서 나는 내가 떠나는 때를 4번의 카운트로 기억했다. 떠나기까지 4개의 신문, 3개의 신문, 2개의 신문, 마지막 신문. 이런 식으로.
마지막 신문을 만드는 날에는 왠지 넋이 빠져있었던 것 같다. 기자들이 "국장님 많이 힘드세요...?" 할 정도로. 묘한 허탈감이었는지 너무 신나 정신을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멍했다. 생각해 보면 학교 신문사는 나에게 꽤 소중했다. 새로운 학교에 뚝 떨어져 얻을 수 없었던 소속감을 준 곳이기도 하고, 내 글이 종이로 나오는 경험을 하게 해 준 곳이기도 하다. 여태까지 쓴 기사들을 보면 진짜 하고 싶어서 쓴 기사도 있고, 그냥 시켜서 쓴 기사도 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마감을 지켰다는 데 만족했던 것 같다. 글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우울함에 빠졌던 날들이나, 그 경험을 전해주자 "국장님도 눈물을 흘리세요...?" 했던 기억도 났다. 그렇게 대단한 타자도 그 어느 날엔 눈물을 흘렸을 텐데 내가 뭐라고. 그래도 마지막 날 울진 않았다. 오히려 헛웃음이 피식피식 나왔고 마지막 컨펌을 받으러 오는 기사들에 다 너그러워졌다. 마음을 비우니 마감도 빨리 끝나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은퇴 직전 호쾌한 스윙을 할 수 있는 비결인가....
알 수 없는 마음. 난 그걸 누가 써주진 않았다. 내가 기자였고, 편집국장이었으니, 이번 한 호를 내며 마지막 데스크 칼럼을 써야 했다. 데스크 칼럼엔 보통 시의적절한 주제에 대한 글을 쓰거나, 이번 호와 관련 있는 이야기들을 쓰곤 한다. 편집자의 일기장이 아니니 이별 편지를 쓸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거기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작별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 작별인사는 곧 새로운 시작에 대한 환영인사라고 했다. 그건 아주 당연하게도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은퇴 타석을 맞이하는 나에게,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아주 진부한 말이라도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 직접 나에게 말해줘야 했다.
중계에 목소리로, 야구 예능에 얼굴을 종종 비추던 이승엽은 얼마 전 두산 감독이 되었다. 다시 전장으로, 이제는 전장의 총사령관이 되어 돌아갔다. 지금까지 오늘까지 두산의 순위가 무려 3위인 것을 보니 꽤나 잘하고 있는 모양이다.(부럽다...)(앗 지금 시점엔 4위로 내려가버렸다.) 새로운 시작이 멋지게 출발한 것 같다. 나도 비슷하게나마 다시 멋진 시작을 하려고 한다. 매일 좌절 속에서도 뭔가 읽고 쓰고 만드는 과정은 멋진 인사말을 준비하느라 그런 거다. 내가 꺼내놓는 인사말이 얼마나 멋질까. 기대하고 들뜨는 와중, 오늘 아침에는 나도 "일어나기 싫었다." 끝과 시작은 이렇게나 어렵다.
*KBO 40주년을 기념하여 뽑은 레전드 40인. 이승엽은 그중 레전드 4인으로 꼽혔다. 기사 전문에 이승엽의 야구 인생이 드러나있으니 꼭 읽어보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