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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chi Mar 31. 2020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1

[무엇이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로막는가] 임산부 이 대리와의 경험의 차이

“과장님, 단축근무 사용하고 싶은데요...

 과장님이 상무님께 승인 좀 받아 주세요.

 아무래도 저는 직접 말씀드리기 불편해서요.”


이 대리가 미웠다. 보란 듯이 열어 놓은 인터넷 쇼핑몰 창도, 하루가 멀다 하고 사무실로 배송되어 오는 택배 박스도, 휴게실에서 몇 시간씩 쉬고 올 때도 참을 수 있었는데, 두 시간에 걸친 미팅을 끝내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온 나에게, 이런 부탁까지 하나 싶어, 굳어져가는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처음 이 대리를 만났을 때, 나는 우리가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거라 느꼈다. 생기 넘치는 그녀는 친절하고 꼼꼼했으며, 나와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업계 정보를 공유하고, 새로운 과정을 기획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당시, 우리에겐 공공의 적인 한 상무가 있었는데, 끝없이 신규 프로젝트를 맡기는 한 상무 때문에 야근을 일삼던 우리 사이에 일종의 연대의식이 생겼고, 실제로 정말 빠르게 친해졌다. 동기가 없어 아쉬웠던 나는, 믿을 수 있는 후배가 같은 부서에 있고, 그녀와 함께 커리어를 쌓아 나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소맥을 들이켜며, ‘커리어 우먼, 파이팅!’을 외치던 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지났을까, 이 대리는 남자 친구가 생겼고, 결혼 준비를 했으며, 가정을 꾸렸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대리의 연애 이야기와 상견례 준비의 과정, 신혼살림 마련과 같은 일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혼자인 나는 누구보다 그녀를 축하했다. 결혼 준비나 신혼여행으로 긴 시간 자리를 비웠지만, ‘이 대리, 지금쯤 한창 신나 있겠구먼, 크큭’하며 흐뭇해했다. 


이 대리와의 대화 주제는 그녀의 결혼과 함께 크게 달라졌다. 주로 점심 메뉴에 대한 품평과 퇴근 후 무슨 국을 끓여야겠다는 이야기, 남편, 시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업무 관련 정보를 나누던 우리의 대화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나는 기혼 여성간 또 다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고, 대화 주제가 풍성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가 있었는데, 바로 '임신', '출산'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게 된 이 대리의 관심은 온통 영유아 제품에 쏠려 있었다. 임신 사실을 부서원들에게 밝힌 그녀는 피로감을 호소하며 휴게실에서 쉬거나 조퇴를 하곤 했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나로서는, 이 대리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겨야 할 때,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스러움 반, 임산부에게 일을 시켜도 되는 것인가 하는 미안함 반'의 감정이 생겼다.

주변의 조언을 구하고 싶었지만, 가족이나 친한 친구 중 임신한 여성은 없었고, 궁금한 게 있을 때, 포털사이트 검색에 의존했다. '배가 불러오는데 회사에서 업무를 줄여주지 않아 서운하다.'는 글과 '임신했다는 이유로 업무에서 제외되어 서운하다.'는 글이 함께 나와 있었다. 조금 혼란스럽긴 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대외적으로는 그녀가 프로젝트팀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하되,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런 나의 지원이, 같은 여성 직원이자 프로젝트 매니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 대리의 자리 비우는 횟수가 잦아지자, 한 상무를 포함한 남자 직원들은 그녀에게 직접 하기 어려운 질문을 나에게 던지곤 했다.


“이 대리 또 어디 갔나? 연락 좀 해 보지?”

“무슨 병원 진료를 이렇게 자주 받나?”


그들의 질문에 뾰족한 감정이 실려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솔직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자리에 있었습니다. 잠시 화장실 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임신하면 컨디션이 자기 맘 같지 않잖아요. 그래도 자료 정리는 다 끝내 놓고 갔습니다. 

 업무는 걱정 마세요.”

 

그녀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 일까지 대신 처리해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내 몸에 병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 진료를 받아보니 스트레스성 이명이라 하였고,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를 진정시키느라 항생제를 끼고 살았으며, 음식만 먹었다 하면 10분 내로 화장실에 뛰어가야만 했다. 


해외출장을 다녀오던 날, 기내에서 답답해진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후, 나는 퇴사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업무량과 그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와 피로였지만, 이 대리의 빈자리를 흘겨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러니 남자들한테 여자들이 욕 먹지, 임신했다고 일을 이렇게 안 하면 회사에서 여성을 어떻게 신뢰하겠어.’ 

‘차라리 그만둔다고 했으면 좋겠다. 대체 인력을 채용하게 된다면, 무조건 남사원으로 채용할 거야.’ 




그리고 그 날 오후, 단축근무 사용에 대해 한 상무의 승인을 받아달라는 이 대리의 요청에, 내 얼굴은 벌게졌다.


“대리님, 이런 말 하면 서운할 수 있겠지만...

 우선 현재 단축근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리님이 직접 상무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저도 맡은 일이 산더미이고, 거기에다 대리님 일까지 처리해야 되는 이 상황이,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팀원들도 다 걱정해요, 요즘 대리님 너무 일 안 한다고요.”


그 날 이후, 우리는 별 일 없었던 듯, 다시 일상을 보냈지만, 택배 박스를 자신의 책상 밑으로 숨기는 이 대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생겨 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믿었던 여자 선배에게 공감받지 못한 서운함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구구절절 내 사정을 이야기 하기에는 불편했고, 바쁜 일상이 이어져 대화할 시간이 없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들어가기 전 마지막 출근 날, 나는 그녀에게 '다시 보자' 말했지만,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고 싶어요. 

 3분이면 출근하고 하루 종일 앉아만 있으면 되니까 진짜 편할 것 같아요.”


그녀가 무심코 던진 말에서, 난 몇 년 전 커리어에 대해 진지하게 포부를 밝히던 이 대리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출산 선물과 만삭이 된 그녀를 택시에 태워보내며, 나는 눈물이 났다. 서운함과 아쉬움, 미움이 겹쳐 마음이 참 이상했다. 


상사와 팀원들은 그녀가 떠난 후, 이제는 더 이상 조심스럽지 않게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복귀할 거래, 안 할 거래?

“T/O 하나 추가로 확보하긴 어려운 거 알잖아. 이 대리 쉬는 동안 오 과장이 다 맡아서 하려면 힘들지 않겠어?

 애 봐줄 사람 없다고 하면 그만두고 아기 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먼저 이야기해 봐.”


씁쓸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이 대리는 육아휴직을 끝으로 퇴사 통보를 해 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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